EBS 2월5일(토) 밤 11시
노장감독의 변신은 때로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 <미녀 훔치기>가 그럴 것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의 좌파 영화감독으로서 이름을 날려왔다. <거미의 계략>이나 <순응자> 등 초기영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와 성적 암시를 혼합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르기까지 베르톨루치는 거장으로서 손색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후 조금 상황은 달라진다. <마지막 황제>와 <리틀 부다> 등은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집착이라는, 전형적인 영화에 이어지는 전형적인 비판을 받았다. 차기작은 소품격인 <미녀 훔치기>였다.
19살의 루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이탈리아에 있는 어머니의 친구 다이아나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다이아나의 남편 이안은 루시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런데 루시의 방문 목적은 따로 있다. 그녀는 4년 전 이곳에서 만났던 니콜로 도나티라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고,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에 있는 시를 보고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온 것이다. 어머니가 쓴 시의 배경은 올리브 나무가 있는 언덕이었는데, 루시는 어머니가 자신을 그곳에서 갖게 된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미녀 훔치기>의 줄거리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가벼운 눈요기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인용 영화라는 착각이 들 만큼 단순하다. 영화 속 주인공인 루시는 자신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몇 가지 미스터리를 해결하고자 한다. 루시는 20년 동안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왔던 이탈리아 통신원과 죽어가는 영국 극작가 알렉스 아니면 조각가 이안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일 거라 추측한다. 여기에 어린 여성이 성적으로 눈떠가는 과정, 그리고 죽음에 관한 담담한 스케치가 어울리면서 <미녀 훔치기>는 진지한 드라마를 완성해간다.
영화는 이탈리아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무기력한 지식인을 그려냄으로써 일종의 함의를 담고 있는 듯하다. 여배우 리브 타일러의 앳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최대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당시 리브 타일러는 거의 신인급 연기자였던 기억이 있다. <미녀 훔치기>는 베르톨루치 감독의 걸작이라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전작들보다 훌륭한 것은 틀림없다. 거의 악몽 수준의 영화로 논해졌던 <리틀 부다> 이후 베르톨루치 감독은 최근 <몽상가들>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거장이라는 수식어에 적합한 평단의 긍정적 태도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