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디 앨런의 현주소 [2] - 근작 5편 소개
2005-02-15
글 : 김혜리

여전히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혹은 원치 않는) 우디

다름 아닌 앨런이 언급한 화장실 유머의 기념비 <아메리칸 파이>로 스타가 된 제이슨 빅스와 인디영화의 요정 크리스티나 리치를 뉴욕의 20대 커플로 캐스팅한 <애니씽 엘스>는 그래서 더욱 눈길을 끈다. 그의 영화로서는 드물게 청춘로맨틱코미디의 외양을 띤 이 영화에서 우디 앨런이 택한 방식은 고집스럽다. 제이슨 빅스의 제리는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존 쿠색처럼 우디 앨런의 젊은 분신이며, 크리스티나 리치의 아만다는 21세기 버전의 애니홀이다. 두 사람과 친구들은 요즘 세대답지 않게 <맨해튼>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입에 올리고 콜 포터와 빌리 홀리데이를 찬탄한다. 우디 앨런은 젊은 코미디 작가 제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소심하지만 욱 하는 성질이 있는 60살의 겸업 작가 도벨이다. 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나 할까? 섹스와 인간관계의 번민과 정신과 상담은 제리가, 갈등을 극단적으로 터뜨리고 수습하는 역은 도벨이 나눠 맡는다.

“너 자꾸 그러면 나이 들어서 나처럼 된다.” <애니씽 엘스>에서 우디 앨런의 메시지는 그렇게 요약된다. 그는 제리와 상호영향을 주고받기보다 일방적으로 주입한다. 낙오자들과 인연을 끊어라, 이용당하지 마라, 복수해라, 장전한 총을 보관해라, 믿을 건 자신뿐이다. 모호한 이유로 홀연히 사라지는 도벨은 거의 제리가 지어낸 환상 같다. 모든 성가신 결박을 끊고 결국 햇빛 찬란한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것은 젊은 제리 혼자다. 늙은 도벨은 우발적 사고를 저질러 자기 발을 묶어버린다. 그는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또는 가기를 원치 않는다. 뭔가 더 배우거나 변한다고 나아질 거라고 믿지 않는 우디 앨런 본인의 모습 같다.

“나는 평생 경미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 우울증에서 비롯된 무관심은 수년간 나를 은둔자나 교만한 사람으로 오인받게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에 흥행이나 리뷰에 무관심할 뿐이다.” 35년이 넘게 영화를 찍은 사람치고 앨런은 자기 영화에 대한 환상이 없는 감독이기도 하다. “<라쇼몽>과 동시상영해도 손색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희망은 계속 품게 되는 거다.” 우디 앨런은 그저 바구니를 짜듯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손을 놓으면 혼란한 상념이 덮쳐올까봐. 마지못해 그러나 규칙적으로. 3년 전, 영화 만들기의 감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자각하겠냐는 <LA타임스>의 질문에 우디 앨런은 “그것은 저널리즘이 지어내는 드라마 안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일축한 적이 있다. <애니씽 엘스>에 나오는 다음 대사는, (주제넘게) 걱정하는 참견꾼들에게 이 원숙한 재담꾼이 던지고 싶었던 윙크인지도 모른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번은 맞는다.”

그동안 무슨 영화를 찍었을까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우디 앨런의 근작 5편

<해리 분해하기> 출연 우디 앨런, 주디 데이비스

본인의 콤플렉스와 체험을 끝없이 소설로 재구성하는 작가 해리 블록의 정신적 해체와 재편을 그린 코미디. 해리는 “변호사와 정신분석의와 창녀에게 인생을 탕진한” 과민한 작가. 처제와의 은밀한 관계를 세부까지 재현한 그의 근작 소설은 이미 헤어진 전처 자매의 분노를 산다. 영화는 블록의 자전적 소설과 실제 경험을 오가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해리의 세계에 침투해 조언하기 시작한다. 모습 자체가 흐릿해져 실직 위기에 놓인 코미디언, 입원한 환자의 아파트를 빌려 매춘부를 불렀다가 저승사자의 방문을 받는 청년의 에피소드 등은 <맨해튼> 이전 앨런의 초기작에 넘치던 판타지적 상상력을 되살리고 있다. 지금와서 보면 팀 버튼의 <빅 피쉬>와 구조의 유사성을 비교할 만하다. 해리는 “모두가 같은 진실은 안다. 우리 인생은 그것을 어떻게 왜곡할지에 대한 선택으로 이뤄진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타자기 앞에 앉는다.

<와일드 맨 블루스> 감독 바버라 코플 출연 우디 앨런, 순이 프레빈

우디 앨런이 연출한 영화가 아니라, 그가 60년대 초부터 함께한 뉴올리언스 재즈 밴드의 유럽 순회공연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감독 바버라 코플은 <할란 컨트리> 등으로 오스카를 수상한 바 있다. 극중 캐릭터와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앨런의 면모가 담겨 있다. 파리를 거쳐야 제3국에 갈 수 있는 용기가 난다는 그는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을 도는 투어를, 정치인들과의 만남까지 포함해 참을성 있게 수행한다. “클라리넷을 연주할 때 나와 악기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뇌를 쓸 일이 아무것도 없다. 꿀에서 헤엄치는 기분이다”라는 고백은 그가 영화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를 짐작게 한다. 앨런은 뉴욕에서는 유럽을 그리고 유럽에서는 뉴욕을 그리는 만성적 불평분자다. 동행한 순이 프레빈은 ‘롤리타’와는 거리가 멀다. 앨런의 사소한 조크에 귀기울이고 유념할 작은 일들을 지적해주는 그녀는, 밝고 사려 깊은 보호자에 가까워 보인다(1997년 당시 순이가 <애니홀>을 포함해 앨런의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스위트 앤드 로다운> 출연 숀 펜, 사만다 모튼, 우마 서먼

재즈평론가 냇 헨토프, 우디 앨런, 작가 더글러스 맥그래스 등의 코멘터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1930년대 가상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에멧 레이의 믿을 수 없는 일대기다. 포주 일을 해서 돈을 챙기고 쓰레기장의 쥐를 총으로 쏘아죽이거나 ‘트레인스포팅’으로 여가를 보내는 에멧은 별볼일 없는 사나이지만 기타를 잡으면 신이 질투할 음향을 낸다. “당신은 감정을 너무 가둬두어 심지어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를 것”이라는 남들의 한탄에 에멧은 “마치 그게 나쁜 것처럼 말하는군”이라고 대꾸한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기절할 정도로 존경하는 프랑스의 위대한 집시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와 말 못하는 세탁부 처녀 해티뿐이다. 숀 펜과 사만다 모튼은, 앨런 영화의 숱한 스타들과 달리 자기 페이스를 성취한다. 특히 눈빛과 뭔가를 먹는 동작만으로 무성영화 히로인의 호소력을 발휘하는 사만다 모튼의 연기는 숨이 막힌다. 우디 앨런의 후기 걸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옥전갈의 저주> 출연 우디 앨런, 헬렌 헌트, 샤를리즈 테론

1930, 40년대는 우디 앨런이 영원히 동경하는 시간이다. <옥전갈의 저주>는, <라디오 데이즈> <카이로의 붉은 장미> <브로드웨이를 쏴라>처럼 2차대전 이전으로 돌아간다. 험프리 보가트 스타일의 보험회사 조사관 C. W. 브릭스는 업무방식을 현대화하려는 맹렬여성 베티 앤 피츠제럴드와 앙숙이 된다. 어느 날 저녁 쇼를 구경갔다가 최면에 걸린 브릭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잣집 금고를 털고 날이 새면 범인을 추적하는 처지가 된다. 탐정영화 장르의 재현으로 샤를리즈 테론이 <빅 슬립>의 로렌 바콜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 브릭스를 유혹한다. 그러나 플롯에 매몰된 영화는 관객이 다 아는 사실을 캐릭터가 발견하는 과정 이외에 별다른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유사한 소재의 전작 <맨해튼 살인 미스터리>에 미치지 못한다.

<할리우드 엔딩> 출연 우디 앨런, 티아 레오니

발 왁스만은 캐리어가 추락하다 못해 급기야 캐나다 툰드라 지대에서 체취방지제 CF를 찍고 있는 감독. 요행히 스튜디오 대표와 재혼을 앞둔 전처의 호의로 6천만달러짜리 마지막 역작을 찍을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긴장과 부담감 탓인지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리는데 그 사실을 숨기며 영화를 찍느라 글자 그대로 좌충우돌한다. “감독이 눈이 먼 거 아냐?”라는 (당연한) 반응을 자아내는 완성된 영화의 꼴은 엉망진창. 그러나 뒤늦게 곤경을 안 전처는 왁스만을 돕다가 새로운 애정을 키우고, 대서양 건너 프랑스 평론가들의 호평은 벼랑의 감독을 구원한다. “신이시여, 프랑스인들이 존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대사에 걸맞게, 2002년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영화는 호평받지 못했지만, <할리우드 엔딩>은 난데없이 눈이 멀어 허둥대는 인물을 빌려 코미디 배우로서 우디 앨런이 지닌 탁월한 보디 랭귀지와 타이밍을 재확인시킨 쇼케이스다.

자료협조 동숭아트센터·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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