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0일 시작된 2005 선댄스영화제가 1월30일 폐막했다. 한국영화 <녹색의자>와 <여자, 정혜>가 올해 신설된 세계 극영화 경쟁부문에 진출한 가운데, 총 202편의 장·단편영화가 관객과 스튜디오, 그리고 언론 앞에서 경합을 벌였다. 미국과 세계 인디영화의 현주소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던 올해 선댄스영화제를 총결산한다. 편집자
2005 선댄스영화제, 대상엔 <우울한 40개의 그늘>… 다큐멘터리 강세
“두 시간이라, 빌어먹을. 이깟 영화를 보려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단 말야?” 2005 선댄스영화제 미국 극영화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우울한 40개의 그늘>의 특별상영(영화제 조직위는 올해 처음으로 시상식 직후인 1월29일 밤 수상작들을 일반 대상으로 상영했다)이 끝난 뒤 셔틀버스에 탄 한 남자관객이 투덜거렸다. 친구와 휴대폰 통화를 하던 남자관객은 “음, X같이 훌륭한 영화라고, X발”이라며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비꼬았다. 하지만 뒤늦게 버스에 올라탄 여자관객은 이 영화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본 작품 중 최고라고요.” “그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단 말이야?” 잠시 티격태격하던 남녀들은 이내 고개를 돌린 채 침묵을 지켰다. 논쟁을 더 해봐야 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올해의 하이라이트는 다큐멘터리
어느 영화제나 마찬가지겠지만, 2005 선댄스영화제에서도 시상 결과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멤피스를 배경으로 명성있는 음악가와 러시아 출신 젊은 아내, 그리고 음악가의 아들 사이의 뒤얽히는 관계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우울한 40개의 그늘>은 졸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걸작도 아니었다. 미국 극영화 관객상을 받은 <허슬 & 플로>나 감독상·각본상을 받은 <오징어와 고래>, 세계 극영화 관객상을 받은 <형제> 등 올해 상을 받은 극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 또한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타임스>나 <보스턴 글로브>는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극영화 대신 올해 선댄스의 하이라이트는 다큐멘터리 작품들이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끊이지 않는 전쟁을 분석하는 미국 다큐멘터리 대상작 <우리는 왜 싸우는가>(이 영화의 감독 유진 재러키는 2003년 선댄스 다큐 대상작인 <프리드먼가 포착하기>의 감독 앤드루 재러키의 동생이다), 잘못된 수사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 <무죄 이후>(After Innocence), 휠체어를 탄 채 럭비 비슷한 격렬한 스포츠를 하는 장애인들의 이야기 <머더볼>, 무슬림 국가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를 믿는 한 가족의 삶을 보여주는 <달의 형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삶을 균형적으로 보여주는 <벽>, 한 피아니스트의 삶을 통해 이라크의 현실을 조명하는 <바그다드의 리버레이스> 등 올해 선댄스의 다큐멘터리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곳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천착하면서 완성도 또한 전반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선댄스에서 한 영화가 주목받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관객의 반응, 시장에서의 성과, 그리고 마지막이 상”이라는 집행위원장 제프리 길모어의 말을 떠올려보면, 유리로 만든 직사각형 트로피의 무게는 칸이나 베를린에 비해 비교적 가벼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지역성의 두각
총 202편의 장·단편영화가 선보인 올해 선댄스의 경향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선댄스는 강력한 상업영화인 <허슬 & 플로>에서부터 <누가 울새를 죽였나?>(Who Killed Cock Robin?) 같은 실험영화까지 다채로운 영화를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프로그래머 캐롤라인 리브래스코의 말처럼 특정한 취향의 영화만을 편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현지의 언론들은 이번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그중에서도 미국 극영화의 특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첫 번째로 지역성이 강하다는 점. <우울한…>과 <허슬…>은 멤피스를, <준버그>와 <바다거북들>(Loggerheads)은 노스 캐롤라이나를, <누가 울새를…>은 몬태나주의 폐광촌인 뷰트를 배경으로 한다. 이에 관해 프로그래머인 존 쿠퍼는 “올해의 많은 감독들은 우리가 각각 얼마나 다른가라는 개념에 입각해 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비슷비슷한 도심 주변에 사는 비스무레한 사람들로 보여졌던 50년대 영화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런 지역적 차별성은 ‘하나의 미국’이라는 신화가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크게 상처입은 사정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대거 출연
또 하나의 경향은 할리우드 스타가 인디영화 속으로 대거 참여한 점이다. 올해 이전에도 스타들은 스튜디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연기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디영화에 출연해왔다. 하지만 올해만큼 많은 스타들이 독립영화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 경우는 드물다는 게 현지 언론의 평가다. 권총을 든 채 비키니 여성 앞에서 멋진 폼이나 잡을 줄 알았던 피어스 브로스넌은 <마타도어>(Matador)에서 삼각 수영복, 카우보이 부츠와 선글라스를 쓰고 시가를 피우는 괴이한 킬러로 등장하며, 나오미 왓츠는 자신이 프로듀싱한 <엘리 파커>에서 오디션을 전전하는 4류 배우로 나와 완전히 망가지고, <프렌즈>의 즐거운 이미지를 간직한 데이비드 시머는 <듀에인 호프우드>(Duane Hopwood)에서 딸아이를 뒷좌석에 태운 채 음주운전을 하다 이혼당하는 어두운 역할로 등장한다. 그외에도 키아누 리브스, 글렌 클로스, 리브 타일러, 제프 대니얼스, 빈센트 도노프리오 등이 컴퓨터그래픽과 화려한 설정을 벗어던지고 ‘맨 얼굴’을 드러내길 꺼리지 않았다. “대본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좋다. 가끔 어떤 영화에서 나는 다른 이와 앙상블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할 만하다. 그건 훌륭한 순간이다’라고 스스로 말하게 된다.” <나인 라이브스>(Nine Lives) <첨스크러버>(Chumscrubber) <하이츠>(Heights) 등 이번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 중 3편에 출연한 글렌 클로스는 인디영화에 출연하는 매력을 설명한다. 스타들의 대거 출연은 선댄스 관객에게 부수적인 혜택도 줬다. 관객은 파크시티 곳곳을 경호원 없이 쏘다니는 스타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하고, 사인을 받는 등 선댄스영화제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순간을 만끽했다. 물론 스타들을 대상으로 각 스폰서가 제공하는 5만달러 상당의 패키지만 챙긴 채 어떤 공식석상에도 나타나지 않은 배우도 있다지만. 이외에도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주제가 부각됐고, 비주얼을 강조하는 뮤직비디오나 광고검독이 대거 출연한 점 또한 이번 선댄스의 특징으로 분석됐다.
여전히 미국 중심, ‘국내용’ 페스티벌
이처럼 다양한 영화가 선보이고 해마다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다 해도 선댄스는 한계가 많은 영화제임에 틀림없다. 올해 월드시네마 부문을 신설했다 해도 영화제는 여전히 미국영화에 또렷한 초점을 맞췄다. <여자, 정혜> <녹색의자>를 포함해 비영어권 영화의 기자 대상 상영은 일반 상영과 대조적으로 한산한 모습을 보였고, 1월25일 아카데미상 후보가 발표된 이후 <버라이어티 데일리>와 <데일리 할리우드 리포터>의 지면에서 선댄스 기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일부 미국영화에 대해 초반 입질을 벌인 뒤 폐막을 나흘이나 앞둔 1월26일 일제히 철수해버렸으며, 4개 부문 60편의 경쟁작과 200편이 넘는 영화가 인구 2만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 한꺼번에 상영되다보니 상영시설과 숙박시설 등의 수용능력 또한 한계치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관객에게 선댄스는 ‘페스티벌’이라는 의미가 가장 어울리는 영화제인지도 모른다. 여기엔 트로피를 향한 무모한 돌진이나 ‘평민’들을 주눅 들게 하는 붉은 카펫, 관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권위적인 상영이 없는 대신 거의 모든 객석을 꽉 채우는 관객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청바지를 입은 스타들의 스스럼없는 태도, 주최쪽이 마련한 콘서트 등 갖가지 부대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가 몇 백만달러에 팔렸느니 하는 이야기가 자신과 별 관계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선댄스의 관객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영화를 선택하며,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영화를 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독립영화의 축제다운 환경을 만들어 제시하는 조직위원회의 현명함으로부터 출발하는 듯했다. 생각해보라. 도착한 첫날 하루 동안에 몰리 파커와 비행기 옆자리에 앉고, 패리스 힐튼과 손인사를 나누며, 키아누 리브스의 사인을 받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선댄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대박’ 후보 영화간의 거래액에 관심만 갖지 않는다면 기자조차 축제 분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그런 영화제인 것이다.
미국 극영화 대상 수상작 <우울한 40개의 그늘>
미국 남부판 <인형의 집>
화려한 파티장, 모든 이들이 즐겁게 음악에 취해 있는 이곳에 딱 한 사람만이 겉돌고 있다. 근사한 파티복을 입은 젊은 여인 로라(디나 코전)는 위태로워 보인다. 이날의 파티는 나이 든 남편이자 멤피스의 전설적인 음악 프로듀서 앨런(립 톤)의 수상식장. 하지만 로라는 마치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파티장 구석을 전전한다. 파티가 끝날 무렵, 앨런은 다른 여인과 호텔방에서 정사를 나누고, 술에 취한 로라는 한 남자에 이끌려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해 남자는 “네가 바란 게 이거 아니었어?”라며 다가들지만, 로라는 그를 거칠게 뿌리친다. 그리고 남녀의 승강이를 엿보는 이가 있으니, 그는 앨런의 아들 마이클(대런 버로스)이다. 이 첫 시퀀스는 <우울한 40개의 그늘>의 모든 것을 예고한다. 앨런은 수차례의 결혼 끝에 러시아 출신 여성 로라를 집안으로 들였지만, 남부 마초인 그에게 로라는 파티장에서나 필요한 액세서리일 뿐이다. 러시아와 미국 남부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로라에게 일상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때 나타난 마이클과 로라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아이라 작스 감독은 마이클과 로라가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과정과 사이 좋았던 앨런과 마이클의 부자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동시에 포착한다. 멤피스의 멜랑콜리한 블루스 음악은 이 우울한 가족 이야기를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게 해준다. 로라가 앨런과 성의없는 섹스를 하다 돌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나 로라가 낯선 이의 오토바이 뒤에 타는 장면 등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우울한…>은 점점 감정을 증폭시키는 나선형의 멜로드라마이자 자신의 욕망에 당당해지는 한 여성을 그리는 영화다.
2005 선댄스영화제 수상작들
미국 다큐멘터리 대상 <우리는 왜 싸우는가>(Why We Fight)(유진 재러키)
미국 극영화 대상 <우울한 40개의 그늘>(Forty Shades of Blue)(아이라 작스)
세계 다큐멘터리 대상 <달의 형태>(Shape of the Moon)(레오나르드 레텔 헴리히, 네덜란드)
세계 극영화 대상 <영웅>(The Hero)(제제 감보아, 앙골라)
미국 다큐멘터리 관객상 <머더볼>(Murderball)(헨리-알렉스 루빈, 데이나 애덤 샤피로)
미국 극영화 관객상 <허슬 & 플로>(Hustle & Flow)(크레이그 브루어)
세계 다큐멘터리 관객상 <악마와의 악수: 로미어 달레어르의 여행>(Shake Hands with the Devil: The Journey of Romeo Dallaire)(페터 레몽, 캐나다)
세계 극영화 관객상 <형제>(Brothes)(수잔 비어, 덴마크)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상 제프 퓨어지그(<악마와 대니얼 존스턴>(The Devil and Daniel Johnston))
미국 극영화 감독상 노아 봄바흐(<오징어와 고래>(The Squid and The Whale))
왈도 솔트 각본상 노아 봄바흐(<오징어와 고래>(The Squid and The Whale))
미국 극영화 연기부문 심사위원특별상 에이미 애덤스(<준버그>(Junebug)), 루 푸치(<섬서커>( Thumbsucker))
미국 극영화 독창적인 시선 부문 심사위원특별상 미란다 줄라이(<우리가 아는 나, 당신, 그리고 모두>(Me and You and Everone We Know)), 라이언 존슨(<브릭>(Brick))
세계 다큐멘터리 심사위원특별상 <바그다드의 리버레이스>(Liberace of Baghdad)(숀 맥알리스터, 영국), <벽>(The Wall)(시몬 비통, 프랑스·이스라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