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고요한 침묵을 찾게 되는 여정, <바이브레이터>
2005-02-28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마음속의 목소리에 시달리던 여자가 침묵의 순간을 되찾는 짧은 여행.

아카사카 마리는 진동을 예민한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다. “이것은 그의 몸이다. 나는 심장과 살갗으로 진동을 느낀다.” “측면에 붙은 스위치를 누르자 얇은 막이 진동을 하는 것 같다. 그 떨림이 나의 사고를 잘게 부수었다.” 자신의 소설 <바이브레이터> <뮤즈>에 이런 문장들을 적어넣은 아카사카 마리는 왠지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어서 이렇게 민감해진 거라는 인상을 주곤 한다. 핑크영화로 출발한 중견감독 히로키 류이치는 이처럼 여성의 육체를 가져야만 공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녀의 소설을 조심스럽고 세심한 터치로 감싸안아 스크린 위에 가져다놓았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둘러싸인 젊은 여자가 자신보다 어린 남자와 여행을 하고, 영원하지 않을지라도 고요한 침묵을 찾게 되는 여정. <바이브레이터>는 제목이 주는 선정적인 느낌과는 다르게 묻어버렸으나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상처를 깊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영화다.

르포라이터 하야카와 레이(데라지마 시노부)는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들에 시달리고 있다. 술을 마셔야만 잘 수 있는 하야카와는 다음날 아침이면 먹고 마신 음식을 모두 토해낸다. 목소리를 쫓아내고 잠을 자기 위해 편의점에서 와인을 고르던 하야카와는 트럭 운전사 오카베 다카토시(오오모리 나오)를 보고 그를 쫓아 트럭에 올라탄다. 먹고 싶어, 저거 먹고 싶어, 라고 마음속으로 독백하면서. 그들은 섹스를 하고 오카베의 납품 경로를 따라 며칠 동안 함께 트럭을 타고 다닌다. 여행 첫날 오카베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고 고백하지만, 하야카와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하야카와는 어느 순간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히로키 류이치는 자신에게는 낯선 도구였다는 배리캠과 AG-DVX 100 카메라를 이용해서 하야카와를 스치고 가는, 너무 가벼워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바람과 소리와 햇빛까지 모두 기록했다. 그럼에도 <바이브레이터>에는 여백이 많고 정지의 순간이 점점이 찍힌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한 덩어리로 눈여겨본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개개의 존재로 느껴야만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로키 류이치의 손에 들린 디지털카메라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젊은 세대의 상징이라기보다 멈추거나 기다릴 줄 아는 나이 먹은 이의 조력자로 보인다. 하야카와가 “만지고 싶어”라고 말하고나서, 조금 울먹이다가 정말 오카베를 만질 수 있을 때까지, 히로키 류이치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필름이 돌아가면 미세한 소리가 나기 때문에 배우들은 다소 긴장하게 된다. 나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잡고 싶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들은 때로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감독 히로키 류이치가 기대한 대로 하야카와 역의 데라지마 시노부는 가끔은 무방비 상태로까지 보이는 멍한 눈빛을 드러낸다. 하야카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저 기다리고 있는 사이 <바이브레이터>는 침묵도 소리가 된다는 평범한 상식을 새삼스럽게 환기시킨다. 입술 너머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출렁인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조명의 도움도 없이 노출된 주연 데라지마 시노부와 오오모리 나오는 편의점에서 눈길을 주고받은 남녀가 곧바로 섹스를 하는 통속적인 설정에 수줍거나 절제된 감정을 덧입혔다. 데라지마는 꾹꾹 눌러담아온 눈물이 아주 조금씩만 새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첫인상을 남긴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있을 때, 내 마음속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 가만히 있는 데라지마는 그런 물음을 던지도록 한다. 시간을 끊고 자막으로만 끼어드는 그녀의 진심도. 영화의 중심이 하야카와인 탓에 자신만의 순간을 갖지 못하는 오카베 역의 오오모리 또한 사소한 수다 사이에 언어를 멈춰 세우고 설명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정(情)을 드러내곤 한다. 왜 울었고 왜 토했는지 묻지 않고, 따뜻한 물을 끼얹어주며 “너무 차갑지 않아?”라고만 보살피는 그는, 하야카와가 느끼는 것처럼 그저 친절하다. 본능으로 다정하고 친절하다고 믿게 한다.

<바이브레이터>는 많은 부분을 내버려두는 영화다. 막연히 흘러간다. 그 때문에 하야카와가 혼자 떠올리거나 경험하는 환상은 마법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냈다기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어져나온 그녀의 마음 한 조각 같다. 커다란 양초를 가득 켜놓은 한밤의 모래밭, 사도마조히즘적인 매춘에의 상상, 모든 사람이 “Seek You”라고 적힌 가방을 들거나 티셔츠를 입은 거리. 오카베로부터 흘러나온 무언가가 하야카와의 마음에 닿을 때마다 형상을 얻는 그 판타지들은 목소리들이 돌아와 하야카와를 괴롭히는 순간 부서지는 듯도 하다. 그러나 오카베는 하야카와를 다독이고 하야카와는 “좋은 사람이 된 기분”이 되어 처음 떠났던 편의점 앞에 돌아온다. 그녀는 오카베와 함께 지내면서 끊임없이 참견하고 질문을 하는 목소리들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는 걸 터득했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맥박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떠나는 오카베의 트럭을 보며 하야카와는 작게 휘파람을 분다. 운전하면서 트럭 운전사들과 무전을 주고받는 오카베가 갑자기 무전을 끊어야 할 때 별일 없고 괜찮다는 뜻으로 휘파람을 불었던 걸 기억해낸 것이다. 하야카와도 같은 뜻이었을 거다. 갑자기 끝난 것 같아도, 나는 괜찮아.


여배우 데라지마 시노부

가부키 명문가의 딸, 망가지다

1972년생인 데라지마 시노부는 가부키좌 오토와카이를 운영하는 가부키 배우 오노에 기쿠고로와 후카사쿠 긴지의 <오모차> 등에 출연한 여배우 후지 준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살 때부터 광고에 출연한 데라지마는 어린 시절 발리볼과 핸드볼 선수로 뛴 활동적인 소녀였고, 샤미센과 일본 전통무용에도 관심을 가졌다. 연기를 시작한 것은 대학에 다니던 1992년. 분가쿠자 극단에 들어간 데라지마는 5년 뒤인 97년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여우상을 타면서 주목받았다. 가부키 명문가의 딸인 데라지마는 영화에 출연하기 전까지 전통적이고 단아한 이미지로 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3년에 출연한 <바이브레이터> <아카메시주야타키신주미스이>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인데다 노출 수위가 높아 파격적인 시도라고 평가받았고, 공공연하게 실연을 고백한 전력 또한 그녀의 이미지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 후지 준코는 시나리오를 찢으면서까지 그녀의 영화 출연을 막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데라지마는 2003년 <키네마준보> 여우주연상과 신인여우상, 블루리본 여우주연상, 마이니치 영화콩쿠르 여우주연상, 도쿄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등 일본의 대부분 영화상을 휩쓸면서 영화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2004년엔 TV 프로듀서들이 선정하는 탓에 스타의 등용문처럼 여기는 에란도르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히로키 류이치의 <기관차 선생>, 최양일의 <퀼> 등에 출연했고, 현재는 장원, 다카쿠라 겐과 함께 장이모 영화에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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