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최양일의 <피와 뼈> [1]
2005-02-28
글 : 김의찬 (영화평론가)
2004년 일본 최고의 화제작 <피와 뼈>는 어떤 영화인가?

폭압적 아버지, 잔혹한 신화가 되다

소설 <피와 뼈>는 양석일에게 나오키상과 쌍벽을 이루는 야마모토 주고로상을 안겼다. 16년이 지나고, 스크린으로 귀환한 영화 <피와 뼈>는 최양일에게 일본영화제의 그랜드슬램에 가까운 업적과 평단의 찬사를 선사했다. 제주도에서 무당이 굿을 하며 되뇌는 “피는 어머니로부터 받고, 뼈는 아버지로부터 받는다”는 말에서 제목을 빌려온 <피와 뼈>는 최양일이라는 붓과 기타노 다케시라는 먹이 만나 터질 듯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괴력의 영화가 되었다. 140분 동안 눈을 떼지 못하도록 움직이는 김준평의 그악스러움과 그에게 짓밟히는 가족들의 처절함은 최양일식 현대 비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대, 사회, 가족을 역류하는 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피와 뼈>에 관한 이야기.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를 보면서 연상되는 소설이 하나 있었다. 나카가미 겐지의 <고목탄>이라는 작품이다.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나카가미 겐지는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나카가미 겐지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은 끝났다”고 평가한 인물이다. <고목탄>은 어느 해안마을을 배경으로 피의 계보, 다시 말해서 세명의 여자를 임신시킨 생부, 그에 대한 아들의 증오심, 그리고 근친상간과 폭력의 정점을 담고 있는 수작이다.

이 소설은 어느 청춘의 고뇌에 관한 기록담이자 자신의 족보를 찾으려는 가족의 처절한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피와 뼈>의 줄거리는 글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양석일 원작의 이 영화는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건너온 김준평이란 한 남자의 일생을 그려낸다. 1923년에 한 청년이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향하는 배 위에 오른다. 청년의 이름은 김준평. 풍요로운 삶을 바라고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전쟁과 궁핍, 그리고 민족 차별의 분위기 밑에서 차츰 괴물이 되어간다. 오사카에 정착해 공장에 취직한 준평은 여인 에게 반해 그녀와 강제로 결혼하기에 이른다.

준평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강인한 체력과 타고난 근성으로 공장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그는 왕국을 지배하는 것처럼 끝없는 착취와 폭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냉혹하기 그지없다. 자신을 준평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난 청년 다케시가 준평의 집안에 나타나자, 다케시와 준평은 말싸움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 앞에서 피를 뿌리며 주먹다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최양일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6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그는 “원작의 장대함과 서정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표현할지 생각하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라고 말한다. 원작자 양석일 역시 “소설 <피와 뼈>는 영화화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하지만 최양일 감독은 20번 이상의 시나리오 수정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통해 원작을 농축시켰다. 그 집념에 경의를 표한다”라며 감독을 칭찬했다.

같은 원작자의 소설 <택시광조곡>은 최양일 감독에 의해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최양일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로 완성된 바 있다. 영화 <피와 뼈>에서 잊지 못할 인물이 또 있다. 주연을 맡은 기타노 다케시다. <하나비> 등으로 세계 영화계에 알려진 감독 겸 연기자 기타노 다케시는 <피와 뼈> 출연에 대해 “<피와 뼈>에 출연한 건 나 스스로를 새롭게 질타하고 격려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건 내가 살아온 시대를 그린 작품이기도 했으니까”라며 소감을 밝혔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괴물, 김준평

기타노 다케시는 <피와 뼈>에서 김준평을 연기했다. 이 영화를 통해 기타노 다케시는 마이니치 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최고의 연기를 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김준평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대미문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그는 극히 폭력적이며 이러한 폭력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동포 1세로 분하고 있다. 부인에게 아무런 이해를 구하지 않고 그녀의 속옷을 강제로 벗겨 겁탈하듯 몸을 섞는 장면, 딸을 계단에서 넘어뜨려 결국 그녀가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고 쥐약을 먹게 되는 것, 그리고 돈문제로 아들과 멱살을 잡고 방바닥에서 뒹구는 모습은 <피와 뼈>에서 보이는 일상적 풍경 중 하나다. 김준평이 결사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돈과 혈육이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몸을 칼로 그어대고, 자신의 핏줄을 낳으라며 여자에게 윽박지르는 장면 역시 <피와 뼈>에선 일상적 순간 중 하나다. 영화 <피와 뼈>에서 김준평은 끝없이 주변 여자들을 탐하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 또한 점점 더 집요해져만 간다. 비정한 남편과 아버지이면서, 준평은 자식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연신 “만세”를 불러대는 기행을 멈추지 않는다. 원래 배우 기타노 다케시는 배역을 맡기 전에 과연 이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원작 속 김준평은 키가 185cm에 이르며 몸무게가 100kg나 되는 체격에 나무 곤봉을 휘두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구와 카리스마의 남자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 속 기타노 다케시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소름이 조금씩 돋아나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이다. 허름한 나무로 만든 집을 그가 몽둥이로 부수어대고, 여자를 능글맞게 겁탈하며 자식에게 주먹질을 서슴지 않는 그의 모습은, 가부장적 폭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동포 1세대들이 느꼈을 역사적 폭력의 무게가 어떠했을지 간접적으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영화 속 김준평의 캐릭터는 한국보다는 일본 신화에 근접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 신화와 전설의 인물 중 하나인 야마토 다케루의 이미지다. 그는 가족의 사지를 찢어죽이는 등 육친간의 처절한 전투를 서슴지 않았던 인물로 전해진다.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아시아의 신화, 특히 일본 신화에 관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며 형제는 다투며 부부는 화합하지 않는다”며 그 특징을 논한 적 있다. 즉 기존의 도덕에 억압받지 않는 신화적 세계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모티브가, 다시 말해 아시아의 신화적 모티브가 역사 경험을 경유하면서 어떻게 영화 <피와 뼈>에 녹아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 영화인들이 공통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피와 뼈>에서 김준평이라는 인물은 여성 관계 또한 복잡하다. 젊은 여성과 다른 살림을 차리고, 이 여성이 병으로 쓰러지면 다시 새로운 애인을 집에 들이는 식이다. 그렇지만 평생 “너는 내 뼈다”라며 자식을 마음대로 다루고 공포에 질리게 하는 김준평에게도 늙고 병든 육체는 찾아온다.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 그가, 거구의 폭력배에서 아주 하찮은 노인네로 전락한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되는 영화 속 장면은 기타노 다케시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 된다.

민족주의와 주변인이 본 일본, 최양일의 화두


양석일의 소설 <피와 뼈>가 출간된 것은 1988년이다. 원작소설은 양석일의 아버지의 삶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재일동포 1세와 2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러므로 영화는 시대적 배경과 당시 오사카의 풍경, 그리고 재일동포들의 삶을 재현해내고 있다. “아버지” 등의 호칭을 일본인 배우들이 연기해내는 것이 특이하다. 각본을 맡은 정의신은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뿐 아니라 <감옥 안에서>(2002) 등 최양일 감독과 호흡을 맞추면서 특유의 문제의식을 작품에 녹여낸 작가다.

영화 스탭들은 오사카의 거리를 스케치하면서 작품의 배경을 구상했으며 동포 1세들의 삶에 대해, 즉 1세들이 어떻게 새해를 맞이했으며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조사하면서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이 노력의 결과, <피와 뼈>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본 풍경은, 지저분하고 추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거리의 풍경은, 영화에서 잘 살아나게 되었다. 무엇보다 <피와 뼈>는 최양일 감독의 영화다. 민족문제와 일본사회의 아웃사이더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피와 뼈>는 최양일 감독의 전작들과 궤를 함께한다. 동포감독 최양일, 일본식 이름은 사이 요이치 감독은 조명기사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는 현장 밑바닥에서 일을 배워 영화를 업으로 삼은 경우로, 흔히 말하는 도제 시스템을 통해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다. 이후 그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우면서 <감각의 제국>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는 <10층의 모기>라는, 한 교통경찰이 강도로 변하는 내용의 영화로 감독 데뷔했다. 폭력과 부조리, 그리고 하드보일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였으며 막다른 처지에 몰린 주인공을 한치의 동정심도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 수작이었다. 이후 최양일은 <언젠가 누군가 살해된다>(1984),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1985) 등을 만들었고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를 통해 이름을 얻었다. 이 영화는 <키네마준보>가 선정한 그해의 영화로 뽑혔고 최양일 감독은 한 택시기사의 일상을 통해 한국인의 문제, 그리고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본, 이라는 감독의 독특한 주제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전화로 “내가 어디에 있나요?”라는 택시기사의 질문에 “달이 어디에 떠 있나요?”라고 답하는 회사 사람의 멘트는 이 영화의 핵심적 대사다. <막스의 산>(1995)은 최양일 감독의 또 다른 수작이다.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막스의 산>은 어느 살인사건을 통해 인물간의 얽힌 과거, 그리고 서늘한 미스터리를 선사함으로써 하드보일드 범죄영화의 수작으로 남았다. 이후 최양일 감독은 <돼지의 보답> 등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비평가 요모타 이누히코는 “스승인 오시마 나기사가 한국문제를 잊지 않았듯 최양일 감독은 일본의 ‘주변’인 오키나와 문제를 고집해 여러 편의 오키나와 관련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논했다.

앞서 말한 <고목탄>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논한 적 있다. “나카가미 겐지는 윌리엄 포크너의 세계성이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남쪽’이란 준주변의 성질이 명백하다. 그가 말하는 ‘골목’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한국의 백낙청 교수가 말하는 ‘제3세계’와 상통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역사와 신화의 교착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최양일 감독에게 <피와 뼈>는 감독이 계속해서 관심을 보인 주변의 이야기, 아웃사이더의 이야기에 일본 속 한국인의 역사라는 거대한 살을 입힌 의미있는 작업일 터이다. 우리는 <피와 뼈>의 영화 속 골목에서, 피와 뼈의 흔적에 골몰하는 한 폭압적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우리의 과거가 독기어린 신화와 만나는 순간을 목격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