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의 스타는 단연 클린트 이스트우드이다. 1930년생인 그는 70대 중반에 만든 25번째 감독 작품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알짜배기 상 네개를 가져갔다. 지난해 그는 <미스틱 리버>로 평단의 열띤 찬사를 받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가 <반지의 제왕>에 안타깝게 밀려나더니 불과 1년만에 이런 영예를 안았다. 대단한 노익장이다. 배우로서 오스카 트로피를 안지는 못했지만 감독이자, 자신이 직접 차린 말파소 프로덕션의 제작자로서 93년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어 두번째로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을 한꺼번에 받았다.
미국 공황기에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하던 부모 밑에서 자라 군복무 기간 중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텔레비전 시리즈 <로하이드>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해 64년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챙이 긴 모자와 망토, 시가를 씹듯이 무는 그의 모습은 서부극의 아이콘이 됐고, 이어 71년 돈 시겔 감독의 <더티 하리>를 통해 형사 액션 영화의 아이콘까지 떠맡았다. 같은 해에 그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로 감독 데뷔를 한 뒤 <서든 임팩트>, <페일 라이더> 등 꾸준히 연출을 해왔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인을 잡아 잔혹하게 응징하는 <더티 하리>의 해리 캘러한 형사의 캐릭터로 인해 미국에서는 ‘파시스트적’이라는 이미지에 묻혀 감독으로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먼저 알아보기 시작한 건 프랑스였다. 프랑스 평단은 80년대 후반 파리에서 그의 작품전을 열면서 그를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 스스로도 88년 <버드>, 90년 <추악한 사냥꾼>을 통해 작품의 깊이를 더하더니, 서부극의 관습을 뒤집는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마침내 아카데미의 공증을 받았다. <퍼펙트 월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미드나잇 가든> 등으로 이어져온 그의 작품연보에서 알 수 있듯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갈등과 기승전결 구조가 분명하고 장르 영화의 틀을 갖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래서 고전적이고 고지식하고, 한편에선 보수적으로 보이지만(그는 공화당 지지자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속 인물의 내적 고민, 그들의 관계망을 깊고 정확하게 포착한다. 아울러 대다수 할리우드 영화가 가진 온정주의와 해피엔드 지향성에 연연해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감정이입이 수월하면서도 냉정하고 적확한 리얼리즘 드라마를 구축했다.
이번 수상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한국 개봉 3월10일)는 이런 그의 작품 경향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노년의 권투 코치에게 31살 난 여자가 권투선수가 되겠다고 찾아온다. 코치는 딸이 있지만, 딸로부터 외면받는 처지다. 여자는 시골 출신의 극빈층으로, 권투가 유일한 삶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코치는 거절하다가 결국 여자의 트레이너가 되고 승승장구하던 절정에서 여자가 사고를 당해 반신불수가 된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진짜 절정은 그 뒤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와 딸의 유사가족의 감정이 이입된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쉽게 보기 힘든 순백의 상실감을 담아낸다. 한국 나이로 76살이지만, 그의 영화 세계는 한창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