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간큰 가족> 북한 촬영 동행기 [2]
2005-03-07
글 : 김도훈

2월22일 화요일 오전

촬영장인 온정리 마을로

아침 7시 20분에 호텔방을 나서자 냉기가 목구멍을 넘어 위장까지 서늘하게 만든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는 날이다. 기자단을 합쳐서 180여명에 이르는 스탭, 배우, 제작진이 동시에 버스에 올라 온정리 마을로 향했다. 온정리 마을에는 <간큰가족>의 주요 북한 로케이션 장소인 온정각이 있다. 온정각은 남한의 여느 관광지 복합시설과도 비슷한 곳으로 식당, 공연장, 편의점, 쇼핑센터 등이 깔끔하게 들어서 있다. 여기서 지난 몇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건너편에는 늘어나는 관광객에 대응할 제2 온정각이 건설 중이고, 작은 스키장과 눈썰매장,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새로운 건물 터가 시원하게 개간되어 있다. 멀찍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이 보일 듯 말 듯 그 모습을 쉽게 내어 주지 않고 있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려는 참에 제작진이 황급히 달려와서 파란 ‘PRESS’완장과 ‘제11차 이산가족 상봉. 특파기자 김권태’라고 쓰여진 나이 지긋하신 분의 명찰을 주고 간다. 버스에서 내리는 남한쪽 이산가족 상봉자 역의 엑스트라가 모자랐던 것이다. 감우성과 김수로가 등장하자 지나가던 관광객들은 발걸음이 멈추어 선다.

이날의 촬영은 북에 두고 온 딸을 만나기 위해 온정각에 도착한 김 노인과 가족이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을 위한 것이다. 10여대의 버스에서 남한 사람들이 천천히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지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김노인이 아들들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신구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다가 갑자기 찾아온 심장의 통증과 함께 쓰러진다. “아버님!”“아버지!” 아들과 며느리의 비명이 온정각에 울려펴진다. 제한된 시간 내에 찍어야 하는 장면. 촬영장을 구경하는 수많은 관광객과 보조를 제대로 맞추어야 하는 엑스트라들을 통제해야 하고, 북한에서 하는 첫 촬영이라는 긴장감도 보이지 않게 감독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전 답사와 꼼꼼한 촬영 준비가 없었다면 그렇게 쉽게 오케이가 떨어졌을 리도 만무하다. “부모님이 실지로 실향민”이라는 조명남 감독은 북한에서의 촬영에 대한 작은 고충들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안내인 군인이 와서 카메라를 다른 방향으로 틀라고 하더라. 마을이 보인다고. 그래서 10여층이 넘는 김정순 휴양소 건물에서 온정리 전체를 담으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현수막도 차에 내걸지 못하게 했다.” 여러 가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조명남 감독은 의의를 찾으려 한다. “온정각이라는 장소만 담아 가더라도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라도 최대한 북한이라는 장소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의의를 두자는 생각이고,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만물상과 삼일포 등지를 최대한 카메라에 담을 것이다.” <간큰가족>이 첫발을 떼면 두번째 시도부터는 쉬워질 것이라는 제작진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 의지가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했을 것이다. 4월28일이면 그들이 동토의 북한에서 무엇을 건져 냈는지, 많은 제약 속에서 김노인의 눈물을 얼마나 결연하게 카메라에 담아 냈는지, 모든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같은 날 오후

“가위로 면을 자르면 수명이 짧아집네다”

목란관은 만물상으로 향하는 계곡에 홀연히 자리잡은 하얀색 건물의 식당이다. “온갖 조미료에 익숙한 남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도 고집스레 냉면을 시켰다. 누구는 북한 하면 지나간 과거사의 아픔들이 떠오른다지만, 그 역시 속으로는 냉면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꿩, 닭,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푸욱 끓여 만든 육수에 감자 전분과 메밀가루를 7:3으로 섞어 만든 쫄깃한 면이 어우러진 북한 냉면의 첫맛은, 독특했다. 육수는 조금 발효시킨 식초를 넣은 듯 진하고, 풀어서 먹는 ‘다대기’는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고추의 매운맛이 강하다. 계속해서 면을 들이키니 점점 진득한 맛이 혀에 젖어든다. 일행 중 한명이 가위를 달라고 부탁하자 동금희라는 이름의 안내원 동무가 경고했다. “북조선에서는 가위로 면을 자르면 수명이 그만큼 짧아진다고 합네다.” 이상하게도 북한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은 금새 신기함을 잃는다. 처음엔 그토록 재미있던 그들의 말투조차 예전부터 익숙했던 것인냥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눈은 밤새 끊임없이 내렸다. 촬영은 둘째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강원도 산간에 폭설이 내려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있는데 (심지어 그곳까지)영화배우 이은주의 자살소식이 들려왔다. 눈보라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2월23일 수요일 오전

딱따구리 소리 들어봤소?

어젯밤 천연온천으로 피로를 풀었던 사람들은 고성항 수면에 반사되는 태양빛에 잠을 깼을 것이다(이곳의 노천온천은 두 달 간격으로 남탕과 여탕이 교체된다. 양기와 음기를 적절하게 조절하기 위해서란다). 온정각에서 금새 끝나 버린 오전 촬영을 뒤로하고 막간을 이용해 만물산 산행에 나섰다. 신발에 아이젠을 붙이고 하얗게 뒤덮인 계곡 자락을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딱딱딱딱딱’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애 처음으로 딱따구리를 보게된 순간이었다. 사진을 찍으려니 금세 날아가 버린다.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딱따구리의 소리를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두 시간 남짓한 산행에서 내려오니 면세점과 쇼핑센터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알코올에 굶주린 상태로 마감에 고통받을 기자 동무 여러분을 위해 들쭉술을 샀다. 들쭉은 주로 백두산 일대에서 수확되는 열매(블루베리의 일종)로 물빠짐이 좋은 백두산 화산 지형에서만 채집할 수 있다고 한다. “와인하고 비슷합네다”라고 설명하는 판매원 여동무의 권유가 경쾌하다. 서울에서 백두산까지 자가용을 몰고 들쭉술 여행에 나선 불알친구에 대한 ‘순수 창작’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은 백두산에서 가장 맛있는 들쭉술을 파는 가게에서 뺨이 발그레한 판매원 여동무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여동무는 그에게 말하겠지. “쫍다란 병 속에 갇혀 있디만 요로코롬 살아서 오묘한 맛을 내는 들쭉술은 우리네 인생과도 같디 않겠서요?”라고.

돌아오는 길

돌아오는 길에 두사부 필름은 현대아산측 관계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온정각에서 초창기의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바라볼 수도 없는 장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이산가족을 둔 노인들은 세상을 떠나고, 생전에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후손들끼리 만나는 일이 늘어갔다. “장본인들은 이미 돌아가시고 후손끼리만 만나는 것을 보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슬프다. 몇해만 지나면 이산가족 상봉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통일부는 손을 놓았다. 북한 촬영을 성사시키기 위해 통일부장관과 접촉을 시도했던 <간큰가족>의 제작부는 “촬영장에 장관이 행차해서 인사드리고 그런 것은 할 수 있다”는 장관 특보의 말만을 들어야 했다(두사부 필름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매스컴의 홍보만 누리겠다는 통일부의 게으른 화답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눈덮힌 온정리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흉물스런 철조망이 시야를 가리는 게 짜증이 나는 순간. 울타리 너머로 사람들이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빠는 가방을 멘 아이의 손을 잡고 걷고, 맞은편으로는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스윽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웃으면서 눈인사를 나누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 전 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간 버스 속 남한 동무에 대해 짧고 실없는 농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각자의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을 것이다. 괜시리 가슴이 뭉클해졌다.

PS. 사실 이 기행문에는 두 가지 결말이 있다.

① 엄숙하게 멋부린 결말 /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검문소를 지나쳤다. 처음 들어올 때 버스 안을 검색했던 잘생긴 군인 동무가 엄숙한 표정으로 모든 이를 스윽 훑고 지나갔다. 3일이 지났는데도 저릿하는 긴장감은 그대로였다. 서서히 검문소를 지나 비무장지대를 달렸다. “오, 칠레여!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덮인 길고 가늘한 꽃잎이여… 아, 언제 다시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조국을 그리워했던 망명객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를 떠올렸다.

② 더욱 사실에 가까운 결말 /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강원도였다. 통일전망대 근처에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리니 분주한 일상이 반긴다. 노란색 빨간색의 번잡한 문구는 막국수와 파전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객들에게 알리고 있었고 반대편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은 고막을 때려 댔다. 다른 행성에 도달한 기분이 들었다. 산행길에서 들었던 딱따구리 소리를 기억해 내려 애를 써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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