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은주 추모 [1]
2005-03-08
글 : 박혜명
사진 : 오계옥
스물다섯 생을 마감한 영화배우 이은주를 추모하며

영화배우 이은주가 세상을 떠났다. 2005년 2월22일 오후, 드레스룸 안에서 숨이 끊어진 채로 있는 것을 그의 친오빠가 발견했다 한다. 1980년 12월22일생, 올해 스물다섯. 웃기만 해도 주위가 봄날 같아질 화사한 나이로, 데뷔 초 보여준 영민한 재능을 다 펼치지도 않은 채 세상과 작별한 배우 이은주를 추모한다.

배우 이은주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날 밤,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기자 출입을 통제한다는 사전 정보에 주눅 들어 큰맘먹고 올라갔건만, 빈소가 마련된 3층 10호실 근처는 이미 취재진들로 오래전부터 메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딩동 소리를 내고 문이 열리면, 기다렸다는 듯 겹겹의 셔터 소리와 발자국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울렸다. “상주들이 앉을 자리가 없다”면서 자기네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몰아닥친 기자 떼를 원망하던 다른 빈소의 사람들도 코앞에서 지나가는 연예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빈소를 나오는 누군가의 오열 소리가 모든 이들의 신음을 한꺼번에 대신할 만큼 크게 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시간은 지루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자정께로 예정돼 있다는 기자회견을 기다리며 빈소를 들락거리는 조문객들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저들이 보고 나온 여배우의 영정 사진은 어떤 것이었을까. 웃는 얼굴이었을까, 무표정한 얼굴이었을까, 혹은 작은 미소만 띤 얼굴이었을까. 그리고 그 사진은 누가 찍은 것일까.

그 꽃다운 재능 다 못피우고

새하얀 눈이 아침을 뒤덮었던 지난 2월22일 오후 1시경, 배우 이은주가 숨이 끊어진 채로 자택에서 발견됐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옷걸이에 넥타이를 연결해 그 줄에 목을 맸고, 왼쪽 손목에 자해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침대를 적셨다는 흥건한 피와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깎이 칼, 그리고 유서 등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증거가 됐다. 재학 중이던 단국대 연극영화과 졸업식에 나흘 전 참석해서 보여 준 웃는 얼굴이 공개 석상에 드러난 마지막 모습이라고 했다.

실제 삶은 스물다섯 번째의 해를 두달도 못 채우고 끝났지만, 배우로서 이은주는 너무 일찍 성숙해버린 소녀였다. 드라마 <백야 3.98>과 <카이스트>를 거쳐 1999년 박종원 감독의 <송어>로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짤막하게 데뷔한 그는, 이듬해에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에서 덜컥 주연을 맡았다. 세 남녀의 야릇한 욕망관계를 흥미롭게 구성한 이 영화의 여주인공 수정은 순수함이란 외피에 가려 좀처럼 욕망이 읽히지 않는 불가해한 캐릭터다. 이은주의 새침한 표정과 말간 인상이 역할과 썩 어울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무살 신인답지 않은 연기가 똑똑하고 능청스럽다고, 언론과 평단은 기특해했다. 그는 오랜 경력을 가진 장년의 두 남자배우(문성근과 정보석)들 틈에 끼어 균형감도 잃지 않았다.

대종상 신인여우상 수상까지 더해진 이 영화로 “영화를 하는 맛을 알았고 연기에 대한 욕심을 얻었다”고 한 이은주는 차기작 <번지점프를 하다>로 배우로서 신뢰감을 더했다. 소극적인 청년 인우(이병헌)가 매료될 만한 밝고 당찬 에너지와 그런 남자를 감싸안아줄 모성애를 함께 가진 여자 태희. 여성스럽게 늘어뜨린 스커트 아래 간편한 스니커즈를 신고 있어, 이젤 앞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도 작은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면 금세 바깥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 여자. 김대승 감독은 이은주가 “계산된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 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 하는 큰 느낌으로 먼저 영화에 접근하고 그게 잡히고 나면 자기가 가져가야 할 느낌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딱 떨어지게 표현해내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사랑스런 태희 그 자체인 듯 예쁘고 고왔던 이은주는 이 영화로 타고난 맑은 인상에다 한결 가뿐하고 대중적인 호감을 더하게 됐다. 영화에 대한 호평까지 이어지면서 그는 감수성과 표현력, 시나리오에 대한 안목을 두루 겸비한 다음 세대의 여배우로 벅찬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단 두편의 영화로, 스물한살의 신인배우가 훌쩍 커버렸다.

실은 이 신인 시절 두편의 영화가 생전에 아홉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긴 이은주의 가장 인상적인 출연작들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연애소설> <하늘정원> <안녕! 유에프오> 등 3년간 해마다 멜로영화에 한편씩 출연했다. 세편에서 맡은 역할은 모두 불치병에 걸렸거나 장애를 가졌으나 그런 슬픈 운명 따위에 굴하지 않는 밝고 씩씩한 여성 캐릭터였다. 그의 맑은 인상과 쾌활한 목소리가 여전히 기여할 바는 있어도 굳이 이은주일 필요 또한 없는 인물들. 그는 자신의 출연작들에 대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 시나리오 전체를 봤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라는 공평한 애정을 고백했지만 두편의 전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긴 아쉬움의 기간이기도 했다.

<연애소설> 한편을 제외하고 호러영화 <하얀방>을 포함해, 영화들의 흥행 성적표도 잇따라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드라마 <불새>가 높은 시청률을 올리고, 조용한 조연으로 출연한 <태극기 휘날리며>는 1100만 관객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이제는 유작이 된 <주홍글씨>가 개봉됐다. <주홍글씨>는 그가 “일 욕심이 많은 성격에” 2년간 쉴 틈 한번 없이 빼곡한 스케줄을 해치워오다 받아들인, 배우로서는 면면으로 어려운 도전일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한 남자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원치 않는 파멸로 이끌어가는 여자 가희를 연기한 그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게 찍었다”는 말로 촬영 기간에 겪은 고단함을 인터뷰마다 표현하곤 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할 무렵 한 인터뷰에서 이은주는 “내 자신을 더 많이 알리고 인기를 얻고 그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좀 튼튼한 벽돌집을 짓고 싶다”고 영화배우로서 길고 야무진 꿈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짧은 기간 훌쩍 크고 그보다 오랜 기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 보였던 여배우가, 웃으면 여전히 밝고 맑아지는 얼굴로 “그냥 영화가 좋다”라고 몇번인가 말했을 때는 그 말이, 그냥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요, 처럼 들리기도 했다. “손가락이 펴지지도 않는 다섯살” 때부터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를 배우게 된 학생 시절엔 자신이 당연히 음대에 진학하고 피아니스트가 될 줄로만 생각했던 그는, 이미 많은 관련 기사들을 통해 알려졌듯이, 고등학교 때 교복 모델에 선발된 것이 계기가 돼 연기자로 발을 뗐다. 그리고는 영화배우로, 고작 6년을 살았다. 스물다섯. 삶을 포기하기엔 지나치게 눈부신 나이이고, 단숨에 포기할 수 있는 무모함도 뜨거울 나이. “너무 일찍 찾아온 통과의례 같았던 영화” <오! 수정>과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보여준 빛나는 총기와 재능을 다시 꽃피워도 좋을 무렵에, 이은주는 중국 배우 완령옥과 같은 나이로 요절한 여배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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