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은주 추모 [2]
2005-03-08
글 : 박혜명

활짝 웃는 얼굴의 영정


학창 시절에 이은주는 바이킹을 타면 안전벨트도 풀고 서서 소리를 지를 만큼 겁없는 성격에 복도를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반마다 불을 끄고 다닐 만큼 장난기 많고 밝은 아이였다고 한다. 물론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익숙하고, 사진이든 대본이든 지나간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 정 많고 내성적인 면도 있었지만, 궁금했던 그의 영정 사진 속 모습은 그렇게 밝기만 했다. 한껏 웃는 맑은 옆모습을 담은 사진은 발인 전 영결예배와 함께 공개됐다. 정교하고 능숙하게 포착된 그 찰나의 사진은, 여배우라는 공인된 사람에 대한 상실감보다 우연히 내뱉은 한숨으로도 시든 꽃을 세워일으킬 수 있는 향기로운 나이를 먼저 실감하게 했다. 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하는 여배우보다 더 어쩔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을 꽃다운 시절에 가둔 사람. 그는 인터뷰 때마다 “세월이 흘러도 신비롭게 여겨지는,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불면증을 동반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여기에 조각조각 공개된 유서 내용이 불씨가 돼 자살 동기에 대한 짓궂은 추측성 보도들이 수없이 쏟아지고 여전히 사람들은 내막을 궁금해하지만, 이런 종류의 호기심은 곧 사그라든다. 사망 소식이 보도되기 무섭게 회원 수가 몇 만명으로 늘어났다는 팬카페들의 게시판도 다시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애도하는 것 같은 이 분위기는 옷장의 옷걸이가 감당하고도 남았던 그녀의 몸무게보다도 훨씬 가벼운 것이니까. 24일 오전 분당 서울대병원에 그의 영결식장이 마련됐다. 70여명의 영화인들로 채워진 그곳 단상에 설경구와 문근영이 영화인추모단 배우 대표로 올랐고, 이은주와 같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문근영이 “불꽃 같은 열정을 채우고 간 사람”이라는 추도사로 짧게 마감해버린 한 사람의 생을 위로했다.

나비처럼 날아간 당신, 우리 속에 살아 있을 겁니다

<씨네21> 독자들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

■ 이은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온라인 <씨네21>에서는 그녀를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많은 독자 여러분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글을 남겼다. 그중 일부를 여기 옮긴다.

■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2005년 2월22일, 나비처럼 날아가버린 당신을 오래도록 기억할 겁니다. 은주씨, 당신을 아끼는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당신은 살아 있을 겁니다.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게요. 그 세상에선 행복하시길. yellemon

■ 처음인가요. 배우로서 이은주의 매력에 대해서 어젯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그 시간 고통스러운 우울함에 빠져 있었겠군요. 나름대로 삶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출연한 작품을 빠지지 않고 보아온 그녀를 그 영화들 속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슬퍼옵니다. 칼로 깎은 듯 콧날에서 입가로 이어졌던 옆모습, 흔들리던 눈망울, 독특한 보이스,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공을 시작한 보석 같던 그녀, 명복을 빕니다. ehk21

■ 얼마 전 그녀의 흑백사진을 보고 정말 흑백이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카이스트> 시절부터 남다른 뭔가를 보여줬던 배우였는데, 비음이 섞인 약간은 불안정한 독특한 목소리에, 순수하면서, 비밀스럽기도 하고, 여리면서 차가웠던 분명히 특별함을 가진 흔치 않은 배우였는데…. 조금만 느긋할 순 없었는지, 철없이 원망하는 마음마저 드네요. 이기적이지도 조금은 뻔뻔하고 계산적이지도 못했던 그녀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연기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버렸던 그녀가 너무 안타깝고 벌써 그리워집니다. 학사모를 쓰고 웃던, 인터뷰를 거절하고 약간은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사라지던 그녀가,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요,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았는데요…. 명복을 비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alcyon17

■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떠난 이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마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새삼스럽게 오늘 떠오릅니다. 아프군요. 그리고 그녀의 그 권리가 남은 이들에게 아픔이라는 점이, 어쩌면… 사강의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걸 알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모습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photoria

■ 사실, 나는 그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영화 속의 한컷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 짧은 생으로 당신 삶의 비의는 필름이 흐르듯 가버리고, 이제 우리는 그냥 곧 익숙해지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삶의 무게는 무엇으로 보상받을까요.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의 무게를 버거워했을 그대를 위해, 나는 쉬이 눈물방울 짓지 못하지만, 그대, 가는 길이 따스했으면 합니다. 이제 곧 봄꽃이 피고 그대가 그토록 힘들어했을 세상은 꽃무리 속에 환할 것입니다. 잊혀지고, 또 사라지더라도. 낯선 땅에서도 행복하시길, 마흔의 사내는 못내 당신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yorut

■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놓고서는…. justin22

■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배웠고, <주홍글씨>로 인해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배웠습니다. 당신의 영화를 통해 사랑에 기쁨에 함께 웃고, 슬퍼하며 눈물 흘렸습니다. 부디 그렇게 사랑했던 이들의 마음을 잊지 마시고 편안히 잠드소서. sukiza

더이상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이 시대의 불행이 아닌가 싶네요. moondi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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