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부터 괴물 디자인 시작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등 각종 SF영화의 DVD 서플먼트와 서적을 통해 비주얼디자인이 선결돼야 함을 알게 된 봉 감독은 2003년 12월 시나리오 작업을 본격화함과 동시에 hellnaut(그는 현재 한 게임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탓에 이름을 밝힐 수 없다)를 현실 속 동물과 상상력을 결합해 괴물의 외양을 창조하는 ‘크리처 디자이너’로 기용해 괴물 디자인에 돌입했다. 이후 또 다른 게임업체의 디자이너가 합류해 각기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 성과물은 2004년 1월 웨타와의 첫 접촉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때는 시나리오가 준비되지 않았고, 웨타 또한 <킹콩>의 제작 일정이 명확하지 않아 생산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뒤인 올해 1월 봉 감독팀은 시나리오 초고와 수백장의 디자인, 동영상 콘티인 애니매틱스 등을 들고 다시 웨타를 찾았다. 꼼꼼한 준비 덕분에 이야기는 예상보다 빨리 진행됐고, 마침내 웨타와 큰 틀의 합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최종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스토리보드와 동영상 콘티인 애니매틱스가 마무리되는 4월쯤이면 공식 계약이 맺어질 전망이다. 제작진은 또 초기작업부터 많은 도움을 줬고 애니매틱스를 만든 한국 CG업체 인사이트 비주얼을 부분적으로 참여시킬 계획이다.
<반지의 제왕> 특수효과팀과 공동작업 합의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으로 재현된다 하더라도 괴물의 모습이 영화와 겉돈다면 <괴물>은 3류 괴수영화에 머물지도 모른다. 사실, <괴물>이 추구하는 바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과 아주 낯선 존재의 충돌이다. 마치 <살인의 추억>에서 너무도 평온한 농촌 마을과 여자의 시체, 또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껄끄러운 존재가 부딪치듯이, <괴물>에서도 한강이라는 한가로운 공간에 돌연변이 괴물이 뛰어들면서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 속 괴물도 그 존재 자체는 아주 낯설되, 지구 생명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탓에 모양새가 지나친 판타지로 흐를 수 없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고 있다. 또 긴 꼬리로 사람을 메다꽂는다거나 사람을 통째로 삼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체구조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hellnaut와 봉 감독이 1년 넘도록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컴퓨터와 손으로 만든 수백종의 괴물은 그동안 너무 외계인스럽다든가, 너무 물고기 같다든가 혹은 통닭처럼 생기거나 디자인적으로 ‘못생겼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오디션’에서 낙방했다. 현재 괴물 디자인은 막바지 단계로, 3월쯤이면 괴물도 최종 ‘캐스팅’될 예정이다.
괴물이 주연? 배우들의 상상력 연기 기대
이토록 괴물에 신경을 기울이다보니 배우들의 ‘질투’도 뒤따른다. 주연을 맡을 송강호는 얼마 전 봉 감독에게 “혹시… 괴물이 주인공인 건 아니겠죠? 포커스는 괴물에 맞고 우리는 흐리게 나오고 그런 건 아니죠?”라며 벌써부터 ‘상대역’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내비쳤다고 한다. 이에 대한 봉 감독의 입장은 명확하다. “괴물에 신경을 쓰는 것은 훌륭한 배우들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예우 차원”이라고. 그에 따르면 <괴물>은 재앙이나 괴수 자체보다는 보살핌받지 못한 고립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피력하는 영화다. 이런 맥락에서 봉 감독은 배우들에게 좀더 집중력과 상상력을 가진 연기를 주문할 생각이다. “배우들에게 조디 포스터가 주연했던 <콘택트>를 보여줄 생각이다. 영화 후반부에 조디 포스터가 눈앞에 펼쳐진 은하계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은하계가 아니라 포스터의 얼굴로 다가간다. 그에 반응하는 포스터의 표정연기와 대사는 정말 놀랍다. 아무리 CG를 강조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배우의 얼굴이고, 연기이며, 대사다.”
사실, <괴물>은 비밀이 많은 프로젝트다. 취재 중에도 제작사는 ‘이건 이래서 밝힐 수 없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저 그림과 사진도 나가면 안 돼요’라며 손사래를 쳐댔다. 워낙 위험요소가 많은 프로젝트인데다 1년 반 정도 남은 상황에서 많은 정보가 공개될 경우에 김이 빠질 것도 우려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들이 애써 숨기는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이 프로젝트에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3월 중에 끝나는 최종 시나리오나, 이동 카메라로 괴물을 찍을 때 사용하는 동영상 콘티, CG작업을 염두에 두고 빈 공간을 바라보며 괴성을 질러야 할 배우들의 모습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동원돼야 할 촬영방법 등. 또 웨타에서 만드는 3D 캐릭터나 비주얼 효과 또한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제작사는 또 다른 무언가를 비밀로 묶어두기 위해 신경전을 벌일지 모른다. 그러니 현재로선 질문은 이 정도로 마무리지어야 한다. 하긴, 1년 반 뒤의 깜짝 놀랄 순간을 위해서라면 몇 가지 비밀쯤이야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배우 캐스팅
변희봉과 송강호가 아버지와 아들로
<괴물>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캐릭터는 네명이다. 그중 두명은 캐스팅이 확정된 상태. 메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박강두는 송강호가, 강두의 아버지 박희봉은 변희봉이 연기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부터 두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로 내세우면 흥미로울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초반부 논에서 시체를 발견하는 롱테이크를 찍는데, 두 배우의 애드리브가 장난이 아니더라. 테이크를 거듭할 때마다 ‘기자들은 왜 불렀냐’, ‘내가 오니까 다 와 있던데’ 하면서 주거니받거니 애드리브를 하더라.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마치 장소팔, 고춘자 콤비를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시나리오의 큰 틀을 가족 이야기로 짜면서 두 사람을 부자 관계로 설정하자고 결정했다.
송강호가 연기할 강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기력함을 뒤집어쓴 인물이다. 딸 현선이(이름확인! 현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목도했으면서도 세상 모르게 태평한 잠을 잘 정도로 어이없는 강두의 행동과 말은 결국 보는 이에게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그가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중에 가장 처절하게 싸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한 영화 안에서 스멀스멀 모습을 바꿔나가는 데 있어 독보적인 송강호 이외에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 없는 캐릭터인 셈. 반면, 박희봉은 이 나사 풀린 아들을 겉으론 구박하지만, 내심 끝없이 보살피려는 인물이다.
다른 주요 캐릭터는 강두의 동생 남일과 남주다. 이 집안의 유일한 대졸자로 항상 불평불만이 심하지만 정작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는 것은 별로 없는 남일과 미련할 정도로 고집이 세고 집중력이 뛰어난 막내 여동생 남주, 이 두 캐릭터를 소화할 배우는 이미 봉 감독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로 내정됐지만 몇 가지 변수가 존재하는 탓에 공식 발표를 못하고 있는 상태. 또 강두의 딸 현서와 둔치를 배회하며 가벼운 절도로 배고픔을 달래는 세진, 세주 형제 등 아역 삼인방도 나름대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크리처 디자이너 hellnaut 인터뷰
“거의 모든 물고기를 접했다. 먹으면서”
-왜 본명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나.
=현재 모 온라인 게임업체에 근무 중이다. 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내가 다른 직원들이 다른 데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입장인데, 이러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hellnaut는 내가 외부의 다른 작업을 할 때 쓰는 이름이다.
-굉장히 많은 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
=작업은 2003년 12월부터 시작했다. 다종다양한 모양의 괴물을 수백장 그렸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감히 게임 캐릭터 디자인은 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실사와 합성을 해야 하니 현실감이 굉장히 중요하다. 움직임이 사실적이어야 하고 디자인도 좋아야 한다.
-동물학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고 들었다.
=평소 디스커버리 채널을 가장 좋아한다. 그런 다큐와 책으로 공부를 좀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동물을 직접 보는 것이다. 이번 괴물은 결국 기원이 어류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물고기를 접했다. 머리 구조를 연구하는 데 좋은 것은 먹는 것이다. (웃음)
-괴물 캐릭터는 현재 어느 정도 완성됐나.
=아직까지 확정안을 만들지 못했다. 1년 약간 넘는 기간 동안 크게는 17차안까지 나왔는데, 앞으로도 몇 차례 더 발전을 시켜야 한다. 확정안을 만들어야 피부 질감까지 살아 있는 아주 정교한 대형 매켓(모형)을 만들어 컴퓨터로 스캐닝할 수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3D 작업을 한다.
-괴물을 디자인할 때 가장 고민하는 점은 무엇인가.
=애초 봉 감독이 요구한 바는 물과 육지를 오갈 수 있고, 적당한 크기에 다리와 꼬리가 있는 형태였다. 또 크기와 구조상 사람을 입으로 삼킬 수 있어야 한다. 어류를 바탕으로 기형 물고기나 특이한 물고기를 참조했다. 아무래도 현실에서 나올 법하면서도 괴물의 환상성 또한 고려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이뤄내는 게 가장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