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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엔 길동무, 세상살이엔 인정! <바이브레이터>
2005-03-23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떨리는 희망 안겨주는 영화 <바이브레이터>

편의점에서 길을 잃은 여자가 있다. 독일산 와인은 왜 모두 화이트 와인이냐고 중얼거리고, 여성지를 펼쳐들면 광고 모델이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다. 여자는 편의점을 들고 나는 남자들을 힐끔거린다. 노랑머리에 낚시 장화를 신은 남자를 발견한다. “먹고 싶다. 먹히고 싶다.” 여자의 독백이 자막으로 뜬다. 남자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스치고 지난다. 히로키 류이치 감독의 <바이브레이터>는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기적 같은 순간은 있다. 여자는 남자가 사라진 뒤 남자를 찾아 편의점을 나선다. 그녀는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나설 사람 같다. 황망한 마음에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면 트럭이 서 있고, 운전석에 남자가 앉아 있다. 여자가 다가가고 남자가 맞이한다. 그리고 여자가 말한다. “만지고 싶어.” 남자는 이유를 묻는 대신 옷을 벗는다. 비좁은 트럭 운전석 뒷자리에서 둘의 몸이 뒤섞인다. 여자는 ‘사랑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 여자, 자신의 감정을 의심할 힘도 없을 만큼 지독하게 외롭다. 트럭 안의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려던 여자는 다시 돌아선다. “길동무 해줄게.” 남자는 선선히 받아들인다. 트럭 운전사 오카베 다카토시(오오모리 나오)와 르포라이터 하야카와 레이(데라지마 시노부)의 여행이 시작된다.

사랑,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바이브레이터>는 한 남자의 몸이 한 여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로드무비다. 요컨대 서로의 몸을 느끼고, 이름을 알고, 과거를 듣고, 이별을 한다. <바이브레이터>의 화자는 여성이지만, 치유자로 남성이 등장한다. 처음엔 그저 순한 양아치 정도로 보이던 남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뭐라 설명하기 힘든 좋은 남자로 남는다. 그 남자,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고, 달콤한 말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가방끈 짧은 그 남자, 배우지 않아도 친절하다. 영화의 대사처럼 “그의 친절은 태도가 아니라 본능”이다.

여자의 몸이 원하는 것을 느끼고, 여자의 마음이 거부하는 때를 알아차린다. 닿는 손길마다 상처를 쓰다듬고, 한마디 말로 아픔을 녹이는 사람이 있다. 그 남자, 순한 수컷이다. 그가 그녀의 눈을 애무할 때, 상처를 핥아주는 수컷을 닮았다.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몸을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그녀는 ‘사랑한다’고 생각해버린다. 무언가 상처를 털어내지 못한 여자, 친구가 전화를 끊을까봐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물병에 오줌을 싸는 여자, 낯선 사람에게 맞은 적도 없으면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맞을까봐 두려워하는 여자, 그녀의 두려움은 남자의 친절 앞에 자신도 모르게 무장해제된다. 그녀의 오랜 구토가 멈추고, 귓가를 울리던 소음이 그친다. 누군가에게 배려받고 있다는 느낌이 그녀를 변하게 한다.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녀를 소음의 세계에서 고요한 침묵으로 인도한다.

그 남자, 대화의 주파수도 잘 맞춘다. 남자의 무심한 친절이 여자의 깊은 상처를 내보이게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선통신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둘은 서로의 지나온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무심한 풍경이 유정한 기억이 된다. 트럭이 지나는 터널, 고가도로, 표지판, 전봇대가 추억이 되고, 스산한 국도변의 늘어선 차들과 스치는 사람들은 기억이 된다. 여자가 트럭 창을 열고 외친다. “여행엔 길동무 세상살이엔 인정!” 좋은 길동무는 마음까지 통한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전전긍긍’이다. 무심한 듯 보이던 남자는 어느새 여자의 기분을 살피는 연인이 된다. 그 남자의 떨림이 그 여자를 설레게 한다. 여자는 “누군가 나의 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여자에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쩔쩔매는 일은 첫 경험일지 모른다. 여자는 “행복하다”고 독백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 설렘

무선통신을 하던 여자에게 다시 소음이 살아난다. 아직 상처가 살아 꿈틀거린다. 여자는 목을 움켜쥐고 “토하고 싶다”고 소리친다. 남자는 쩔쩔맨다. 겨우 정차할 곳을 찾는다. 여자는 구토증세를 참을 수 없지만, 토사물은 목구멍에 걸려 올라오지는 않는다. 남자는 무언가 도와주려고 애쓴다. 여자는 “혼자 내버려두라”고 소리친다. 여자는 싫다고 하는데도 자꾸 도와주려는 손길이 싫지만은 않다. 여자는 어쩌면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여자가 바닥까지 게워내듯 심한 구토를 한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남자의 다리를 때리며 눈물을 쏟아낸다. 여자가 우두커니 여관방에 앉아 있다. 남자가 욕탕에서 여자를 부른다. 적당히 물을 데우고 기다리고 있다.

여자의 어깨에 물을 끼얹으며 “차갑지 않냐”고 묻는다. 여자는 “딱 맞아”라고 답한다. 그리고 독백한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친절할까. 감정이 없는 데서 나오는 친절함, 동물적인 본능의 친절함을 이 남자는 갖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를 부르면서. 이들의 항해는 여자가 상처와 화해하는 과정이다. 항해가 길어질수록 여자는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로 돌아가 상처의 심연과 얼굴을 마주한다. 상처가 소음으로, 회상으로, 환상으로 영화 중간에 끼어든다. 그녀는 외로움에 쩔쩔매는 여성에서 무언가에 상처받은 고등학생으로, 해맑은 얼굴의 초등학생으로 퇴행한다. 그리고 화해한다. 그녀, 다시는 먹고 토하던 자학의 시절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이제 여자는 남자의 말에 일일이 대구하지 않는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소통이 된다. 남자는 능숙한 운전사다. 국도변도, 인생길도, 잘 달린다. 어쩌면 그것도 본능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운전을, 아니 인생을 가르쳐준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따라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면서 트럭운전을 익힌다. 그리고 웃는다. 그녀에게 운전은, 인생은 두렵지만, 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처음의 편의점 앞이다. 여자는 “소음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물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지만”이라고 덧붙인다. 여자는 안다. 모든 것은 잠정적이다. 그리고 떠나는 트럭을 바라본다.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은 남자가 무선통신 동료들에게 날리던 무사함의 표시다. 그녀는 다시 편의점에 들어가 처음처럼 와인을 산다.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이제 남자를 힐끗거리는 대신에 자신을 찬찬히 응시한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라고 말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극장을 나서도 오랫동안 남는다. 퇴근길, 도로변의 희뿌연 가로등을 보면 왠지 스산한 상념과 떨리는 희망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문득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어진다. <바이브레이터>는 오랜 울림으로 남는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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