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일간의 달콤한 악몽
절친한 사이인 김지운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4월1일 ‘격돌’한다. <달콤한 인생> 대 <주먹이 운다>. 물론 두 감독이 원했던 일은 아니겠으나 배급 등의 조건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오죽했으면 김지운 감독의 꿈에 이를 걱정하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등장하기까지 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 하며 먼저 시사회를 연 <주먹이 운다>의 반응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주먹이 운다>의 시사회 다음날 아침 8시, 김지운 감독은 약속된 <달콤한 인생> 제작기를 보내주는 대신 “지금 최종 믹싱 끝났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또 밤을 샜지만 마감을 더 늦출 수는 없는 일, “고생하시네요. 좀더 고생해주세요”라고 할밖에. 밤낮을 거꾸로 살며 노심초사해온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회고록’은 이렇게 또 날밤 새며 작성됐다.
시작
2004. 1. 1 제목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혼자 쓰고 싶지 않았다.
초고 정도는 글 잘 쓰는 작가에게 맡기고 싶었다.
며칠 전 글 잘 쓰는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압구정동의 라바짜라는 커피 파는 가게에서 만났다.
“이번에 하려는 게 누아르거든요. 아주 드라이하고 쿨하게 시작해서 웨트하고 핫하게 끝나는 이야기예요 ”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글 잘 쓰는 작가는 1월1일 같은 장소인 라바짜 커피숍에서 만나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장소로 나가려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데 전화가 왔다. 만나기로 한 작가가 연휴 끝나고 만나자고 한다. 바지 지퍼는 올리지도 못하고 도로 벗어버렸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시나리오
2004. 1. 4 “이 아저씨, 시나리오가 장난인 줄 아나?”
사흘 동안 자고 먹고 글만 썼다. 만나기로 한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그냥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이 아저씨, 시나리오가 장난인 줄 아나?” 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늦은 밤 대강의 초고를 끝내고 오랜만에 세수나 해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거지 한명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난다.
2004. 2. 15. “소영아, 애는 다음에 낳으면 안 돼?”
<장화, 홍련>을 끝으로 다시는 나와 작업하지 않을 작정으로, 올해는 애 낳을 계획임을 사전에 선포한 이소영 조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웬일이세요?”
“임신했니? ”
“아뇨. 왜요? ”
“애 다음에 낳으면 안 돼?”
“감독니임!!!!”
이소영은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전화를 끊어버린다.
2004. 2. 16 “소영아, 생각 잘 했다”
이소영 조감독 첫 출근.
2004. 3. 7 이병헌 포획작전 개시, 완료
이안규, 신은영, 김민석 등 연출부 구성.
이소영, 오세경 조감독과 더불어 2인 조감독 시스템으로 결정하다.
이병헌과 만나기로 했다.
또래의 한국 연기자 중 어떤 모호한 감정의 흔들림과 그 흔들림을 자기 안에서 파장시키고 걷잡을 수 없는 장렬한 파멸감을 섬세한 빛깔로 연기해야 하는 주인공 선우 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감히 이병헌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미리 소문나는 게 달갑지 않아서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조용히 만나기로 했다(미리 밝혀두지만 이날 이후로 아주 자주 만났는데 소문 한개도 안 났다).
장소를 고민하다 귀찮아서 결국, 라바짜에서 만났다.
초고를 보여주려다 읽은 뒤에 안 한다고 할까봐 입으로 각종 효과음을 내며 영화 분위기를 설명. “투앙!투앙! 총에서 불이 뿜어지면 저쪽에서 흙먼지가 불어와 휘이잉∼. 그 순간 주인공 선우가 고독한 모습으로 짜잔∼ 하고 폼나게 걸어들어와. 어때? 괜찮지?”
“스카이라운지라면서 흙먼지가 어디서 불어와요?”
“그럼 흙먼지 빼고 음악 넣지 뭐. 뚜뚱! 이렇게. 괜찮지?”
의심에 찬 표정이었지만 얼마 안 가 효과음의 얼빼기 교란작전이 먹혀들었다.
미술 컨셉
2004. 4. 9 우아르의 탄생
<피도 눈물도 없이>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에서 힘있고 냄새 풀풀나는 미술을 보여준 류성희 미술감독이 <쓰리, 몬스터>를 끝내고 합류했다. 영화 전반에 걸친 미술 컨셉 회의. 특히 주인공 선우가 일하는 호텔의 공간, 통로, 복도, 스카이라운지 등을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상승의 이미지로 스카이라운지는 원색이 강하고 반사물이 많고 광택이 나며 최대한 럭셔리하게, 하강의 이미지로 지하 나이트클럽과 연결복도는 어둡고 무광택이며 모노톤의 음습한 느낌이 들도록 최대한 누아르필나게. 빛과 어둠, 광택과 무광택, 반사와 무반사, 원색감과 모노톤, 우아함과 불온의 기운이 감도는 이런 충돌하는 이미지가 한 공간 안에 있는 호텔의 기이한 이중성의 공존이 아슬아슬한 인생사를, 그런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선우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공간이었다.
2004. 5. 10 김영철 선배, 죽인다
가만 있어도 중년 남자의 멋이 줄줄 흐르고 표정 하나만으로도 힘과 중후함이 느껴지는 멋진 아저씨가 필요했다.
선우의 보스이자 가공할 적이 되는 강 사장 역할이다.
이를테면 알 파치노처럼 활활 뜨겁게 타는 쪽이 아니라 이브 몽탕이나 빌리 밥 손튼처럼 그 뜨거움을 내면에 꾹 누르고 있는 쪽의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왜 한국에는 숀 코너리나 해리슨 포드나 야쿠쇼 쇼지나 장 가뱅처럼 기품있고 멋있게 나이를 먹는 연기자들이 부족할까? 캐스팅의 고민은 급기야 엉뚱하게도 멋있는 아저씨가 되는 게 이 사회에서 이렇게 어려운 건가 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난데없이 전에 박찬욱 감독이 김영철 선배님 만났던 얘기가 떠올랐다.
전화를 걸었다 “김영철 선배님 만나보니 어떠셨어요? ”
“아우, 죽이죠. 폼나요.”
하이얏 호텔 커피숍에서 김영철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미인계를 쓸 요량으로 이유진 피디와 함께 나갔다.
차 안에서 언뜻 이유진 옆모습을 보고 같이 나온 걸 후회했다. 속상했다.
호텔 로비에 서성이는데 입구쪽에서 한 멋진 아저씨가 기품있고 힘있게 뚜벅뚜벅 걸어들어온다. 이유진과 동시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김영철 선배님이다.
“죽인다.”
“끝장이다.”
미인계 작전은 실패했지만 효과음 없이 작품으로 승부했다.(ㅡ ㅡ );;
스탭진용 확정
2004. 6.5 제목 <달콤한 인생> 확정
<장화, 홍련>을 같이했던 이모개 촬영감독의 일정에 차질이 생겨 다른 촬영감독을 찾아야 했다.
초조했다. 그러다가 데이비 린치와 테렌스 맬릭이 나온 학교로 유명한 A.F.I에서 촬영을 전공한 재원 김지용 촬영감독을 류성희 미술감독이 소개해주었다.
며칠 전 그의 단편을 보았다. 훌륭했다. 장편상업영화는 처음이지만 <장화, 홍련>에 이어 또 한번 신선한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촬영 김지용, 조명 신상열 합류.
무술감독 정두홍 합류.
이제 어느 정도 모양새와 전열을 갖췄다.
제목 ‘달콤한 인생’ 확정.
스탭 신바이신
2004. 6. 14 “미리 환장하시면 어쩝니까”
영화 하면서 처음으로 전 스탭을 불러서 신바이신을 했다.
처음엔 어색했고 힘도 들었지만 스탭들 반응이 나쁘지 않아 결과적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분석을 하면서 스탭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바람에 정서를 실어주세요, 이러면 우리 환장하죠.” 데몰리션 특효팀장.
“무섭지만 웃기기도 하는 시체 만들어주세요. 이러면 우리 환장하죠.” 셀 특분팀장.
“CG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러면 우리 환장하죠.” DTI C.G 팀장.
귀신들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다. 내가 현장에서 자주 쓰는 대사들인데. 대략 난감하다.
출연진 확정
2004. 7. 7 나의 천군만마들이여
<천군>에 출연하는 황정민이 특별출연하기로 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김뢰하 합류. 단연 누아르 최고의 얼굴.
해결사 전문 이기영, 볼수록 기기한 오달수 확정.
이들 모두 기꺼이 오디션에 참여했고 이렇게 해서 누아르 냄새는 갖추게 되었다.
찜통 무더위 속 액션쿨에서 정두홍 무술감독, 이병헌과 액션설계.
선우를 나락의 구덩이에 빠뜨리는 희수 역에 신민아 미팅.
신민아는 자기 생각을 아주 천천히 극도로 조심스럽게 느릿하게 말을 한다.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다시 말한다.
말씨가 예쁘다.
말들은 점점 빨라지고 강해지는데 이런 말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 뒤에 하는 테스트 촬영에 참여하기로 했다.
테스트 촬영
2004. 7. 25 자신감이 생긴다
테스트 촬영도 무사히 마쳤다.
결과물을 보니 본편 화면 때깔이 장난 아닐 것 같다. 자신감이 생긴다.
연기자들 리딩과 동선 리허설.
이병헌, 김영철, 신민아, 김뢰하, 황정민, 이기영, 오달수 참여.
워낙 개성이 강하고 기가 센 연기자들이라 톤 잡고 밸런스 잡는 데만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낼 것 같다. 그런데 뭐, 감독이 그런 거 하는 거지 하며 불안한 마음을 잠재운다.
김영철 선배가 후배 연기자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며 분위기를 편하게 해준다.
신민아에게 오늘부터 배우기 어렵고 연주하기도 어렵다는 첼로 연습을 시작하라고 했다.
양수리에서 가진 1박2일의 리허설 합숙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간다.
차 안에서 검은 슈트와 레인코트를 입고 서로를 애증의 시선으로 노려보며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들을 상상하며 히죽 웃다가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가신다.
그간 더위를 밥먹듯하며 많은 준비를 해왔는데 들여다보면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항상 이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