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과연 거장인가?
베르톨루치가 처음부터 강건한 마르크시스트 사상가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때부터 현명한 예술가의 자질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베루톨루치는 애초에 자기 재능보다 더 많은 격려를 받았던 감독인 것 같다. 그가 초기에 집중했던 것은 고다르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1968년 5월혁명이 일어나던 그해 만들었던 <파트너>는 고다르의 영역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러고나서 만든 <거미의 계략>(1970)과 <순응자>(1970)에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의식적 몸짓이 있다. <거미의 계략>에서 보여준 우아한 미장센과 알레고리는 일종의 베르톨루치식 변용의 성공담이다. 그러고나서 만든 영화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라는 과찬의 영화였고, 베르톨루치의 진정한 걸작 <1900>은 1976년에 만들어졌다.
베르톨루치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에는 일종의 내적 연관이 있어 보인다. 초창기의 알레고리 영화들과 <마지막 황제> 이후 문화적 풍물에 취해 있는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어떤 ‘자극성’에 휩쓸려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스타일이 있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할 도리가 없다. 베르톨루치가 존경했던 고다르, 파졸리니와 그 자신이 갖는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내게 있어 60년대는 1975년 피에로 파올로 파졸리니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그의 죽음은 나의 유토피아적 비전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베르톨루치가 존경했던 파졸리니는 섹스로 정치를 폭파시켰던 것이지, 그것을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혹은 센세이셔널리즘을 정치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다르는 지금도 영화가 스펙터클이 되는 것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68혁명의 정신적 기수였던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가 조심하라고 끊임없이 외쳤댔던 것도 스펙터클의 사회다. 그런데 베르톨루치는 <몽상가들>에서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역으로 스펙터클화한다. 1968년의 구호 중에 ‘시체를 사랑하라. 그것처럼 영화를 사랑하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몽상가들>은 어리석은 시네필의 전형적인 결과물로서, 영화를 사랑하는 부적절한 방식의 예증으로서, 반성적인 재고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베르톨루치의 언젠가 다음 영화가 정말 <1900>의 속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죽기 전에 <1900>의 진짜 속편을 만들 수 있을까.
앙리 랑글루아 사건
부당해고된 영화주의자를 위하여
앙리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공동 설립자(또 한명의 설립자는 조르주 프랑주였다)이며 운영자였다. 영화 속에서 매튜가 말하는 것처럼 랑글루아의 지론은 어떤 영화가 훌륭한 영화인지 알 수 없으니 되도록 많은 영화를 수집하여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몽상가들>의 초반 장면에서 세 인물이 새뮤얼 풀러의 <충격의 복도>를 보는 장면이 있듯이 그 시절의 젊은 영화광들은 그곳에 모여 줄기차게 모든 종류의 영화를 봤다. 누벨바그 같은 프랑스의 영화 세대들은 랑글루아가 운영하는 그곳에서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며 공부했던 셈이다.
일명 ‘랑글루아 사건’은 1968년 2월에 터졌다. 드골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던 앙드레 말로는 앙리 랑글루아를 전격 해임했다. 그러자, 프랑스 영화인들은 시네마테크가 있는 팔레 드 샤이요 궁 앞에 모여들어 랑글루아의 복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선배격인 장 르누아르를 위시하여 브레송, 카르네,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리베트, 레네, 로메르, 철학자 롤랑 바르트까지도 가세했다. 미셸 피콜리, 장 폴 벨몽도, 장 피에르 레오 등의 배우들도 적극 참여했다.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시위에 참가한 인원만도 수천명에 이른다. 찰리 채플린, 피카소 등 각지에서 예술계 인사들의 항의문도 전달됐다. <몽상가들>의 초반에는 이 장면이 기록 화면과 함께 재현된다.
시위는 지속됐고, 정부는 내정자와 함께 시네마테크를 공동 운영할 것을 제안하지만 랑글루아는 거절한다. 이 시기 <카이에 뒤 시네마>는 랑글루아 복직을 위한 지지자 서명 운동과 함께 앙리 랑글루아 사건의 전모를 잡지에 싣는다. 영화계 단체들까지 여기 협력한다. 급기야 정부는 4월21일 시네마테크의 독립 운영권을 인정하고, 다음날 4월22일 랑글루아는 책임자로 복직하게 된다. 고다르의 <주말>이 파리에서 상영하고, 린제이 앤더슨이 학교 지붕 위에서 학생들이 기관총을 쏘는 영화 <IF…>를 만들던 1968년 그해 봄에 있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