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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영화가 개봉하면 영화전문기자와 평론가,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들어 그 영화를 술안주 삼아 온갖 언어의 유희를 즐기게 된다. 그 내용이 밝고 긍정적이기만 한다면야 영화를 직접 만든 감독의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생기겠지만, 이 잔인한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걸 어쩌랴. 새 영화를 공개적으로 선보일 때만 되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감독이라는 존재, 도대체가 이렇게도 초라해질 수 있는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처녀귀신보다 더욱 한 많을 이 감독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한풀이를 해야 할까. 꾹꾹 눌러둔 그 많은 한을 풀기에는 잡지의 몇 페이지도, TV의 몇 분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그러자 DVD라는 새로운 매체가 그 수많은 감독들의 한을 풀어주고자 코멘터리라는 부록을 만들게 되었다고 하는데...
당신이 코멘터리의 유래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DVD에서 코멘터리라는 존재는 감독들에게 구세주와도 같은 소통의 공간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1시간 반, 긴 경우에는 무려 3시간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 참고 참았던 여러 울분을 토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개봉 전후에 언론의 직격탄을 맞거나 좋지 않은 흥행을 기록한 영화의 경우에 그 코멘터리의 한풀이 수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매무새에 비해서 지독하리만치 저평가 받았던 <역도산>의 경우도 그러한데, 극장판에서 10분이 추가된 감독판으로 DVD가 나온다는 소식보다 더욱 눈이 번쩍 띄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신명 나는 한풀이가 139분 내내 지속되는 코멘터리다. 악에 받친 나머지 우리나라의 영화전문기자와 영화평론가들은 다 바보들이라고 폭탄선언까지 해버리는 송해성 감독의 솔직하고 시원한 해설은 DVD가 영화 관계자들 간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되었음을 명확하게 증명해준다.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는 아쉬움이 남을만한 내용의 코멘터리지만, 감독이나 PD, 배우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우리는 DVD의 코멘터리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가장 깊은 속내를 훔쳐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도산 감독판>은 그 어떤 매체도 아닌 DVD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극장판에 비해 10분이 추가된 ‘감독판’이라는 이름이 주는 재미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소 다르다. 감독판의 상영시간은 139분으로 극장판에 비해 2분이 추가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송해성 감독이 극장판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새로운 영상을 추가하여 재편집했기 때문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에이리언>을 감독판으로 재개봉하며 오히려 상영시간이 1분 줄어든 것과 같은 경우로 이해하면 된다. 감독판은 상영시간의 단순한 증가가 아닌 감독의 의도에 맞는 재편집의 의미이며, <역도산 감독판>은 그러한 명제에 100% 충실하다.
하지만 이 타이틀이 DVD로서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추가된 장면들의 화질은 (그나마 좋지 않은) 극장판의 영상에 비해서도 눈에 띌 정도로 열악하고, 부록 또한 인터뷰와 제작현장 위주로 단조롭게 구성되어 있다. <역도산 감독판>은 한국영화 DVD의 대부분이 극장에서의 흥행 여부와 그 질적 수준이 직결된다는 슬픈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타이틀이기도 하다. 국내의 DVD 시장이 더욱 커져 극장에서의 수모를 DVD가 고스란히 이어받는 악습이 하루 빨리 고쳐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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