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스탭·배우들 합심
하지만 길벗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박광수 감독의 소개로 지난해 여균동 감독과 <숨바꼭질>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주요 스탭들이 흔쾌히 결합하지 않았던들 3억원 안팎의 저예산영화 <비단구두…>가 지금까지 순항할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제창규 촬영감독, 배현종 조명감독, 배영환 미술감독 등 주요 스탭들이 <비단구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좋아하는 선배 감독이 계속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빠듯한 예산 때문에 발전차도 대기시키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이 믿는 것은 ‘발상의 전환과 끊임없는 아이디어 개발’. 이날 저녁 촬영 때도 배현종 조명감독은 “1kW조차 사용할 수 없는” 한계조건 아래서 빛을 모으느라 정신없었다.
극단 차이무 출신 배우들의 헌신적인 참여도 <비단구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줬다. 촬영 직전 한달 가까이 연극 한편 올리듯 꼼꼼하게 사전 리허설을 했다는 만수 역의 최덕문은 “테이프 하나 장전하면 50분을 쉬지 않고 찍어대는” 무지막지한 HD 카메라 앞에서 20번 넘는 재촬영의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나도 배우 해봐서 알지. 이번엔 좀 덜 치사하게 가자. 이번엔 짜증을 10%만 눌러줘. 이러면 배우가 나중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된다고. 그거, 사람 죽이는 일이지”라고 웃는 여균동 감독은 “기본기 탄탄한 차이무 배우들 덕에 바로바로 연기자의 느낌을 수정할 수 있는 HD 카메라의 효용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고 뒤늦게 칭찬한다.
“영화, 마음으로도 만들 수 있다”
“길 떠났으면 어떻게든 찍고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동하는 데 이틀을 까먹는다”는 나름의 로드무비 제작 원칙을 견지했던 <비단구두…> 팀은 전국 일대를 돌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수차례 겪어야 했다. 개마고원 간지가 물씬 나는 인적없는 도로를 발견해 촬영을 진행하다 특수부대 훈련장소인 것을 뒤늦게 알고 “좋게 말로 할 때 나가라”는 지프 탄 군인의 엄포에 “필름 뺏고 카메라 부술까봐” 곧바로 짐싸고 물러난 사건이, 1년 전 굳이 따로 장식하지 않아도 북한 음식점 같아 보이는 건물을 발견해 쾌재를 불렀으나 막상 촬영 때는 삼겹살 집으로 둔갑해 개업하는 바람에 땅을 쳤던 순간이, 마그네슘으로 된 폭발물을 갈대밭에서 터트렸다가 불이 붙어 제작진 중 누군가가 쇠고랑을 찰 뻔한 일화가 그것이다.
“솔직히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생고생하나 하면서도 나중에 영화를 본 관객이 인물들의 여정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길 떠난 만수 일행이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최덕문) “영화가 돈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완성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느꼈다.”(제창규) 없는 것투성인 가난한 <비단구두…> 촬영현장. 그러나 영화만을 바라보고, 영화에 목매는 열정만큼은 짧은 시간 관찰에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참고로 영화진흥위원회와 KBS가 함께 마련한 방송영화제작지원 사업 선정작 중 1편인 <비단구두…>는 여름에 후반작업을 마치고 하반기에 스크린과 방송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여균동 감독 인터뷰
“<세상 밖으로>의 실향민 할머니에 관한 못다한 이야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는 오래전에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5년쯤 됐나? 세상과 거리두고 스님처럼 사는 한 선배의 이야기에서 아이템을 떠올렸다. 선배의 아버지는 월남한 분이었는데, 죽기 전에 고향인 개마고원에 가보고 싶어했다고 했다. 아버지 병환이 심해지자 아내와 함께 북행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들었을 땐 아버지를 업고 아들이 길을 떠난다는 설정이었는데. 바뀐 건가.
=아니다. 감동적인 걸 원했다면 아버지 업고 북한에 가는 이야기였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남한이라는 사회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고, 그래서 남쪽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북에 관한 이미지로 가득 찬 가짜 개마고원을 만들어 방문한다는 설정을 떠올렸다. 장길손 설화에서 모티브를 빌려와 <텬길손 씨의 고향방문기>라는 이름의 우화 버전을 하나 써보긴 했는데, 누가 <빅 피쉬>랑 닮았다고 해서 그건 포기했다.
-<비단구두…>는 데뷔작 <세상 밖으로>를 떠올리게 한다. 로드무비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 밖으로>에서 문성근, 이경영이 무턱대고 빨리 가자우, 하는 할머니에게서 도망치는 장면이 있다. 이번 영화는 어쩌면 실향민인 할머니와 그의 아들에 관한 못다한 이야기일 수 있다. <비단구두…>에 실제로 그 설정을 본떠 찍은 장면이 있다.
-시간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 <세상 밖으로> 때와 비교하면 감독의 시선도 달라졌을 텐데.
=공부한 게 있어야 변하지. 만날 술먹고 놀았는데, 뭘. (웃음) 다만, 분단이라는 문제를 이데올로기나 현실 논리가 아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 영화인데, 해답을 구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HD 작업은 처음이다.
=처음에 두려움이 많았다. 촬영 세팅도 까다롭고, 후반작업시 에러도 많다고 해서. 그런데 제창규 촬영감독이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 스탭들 믿고 간다.
-곧 개봉할 <간큰가족>과 설정이 유사한데.
=접근 방법은 비슷한데 지향과 스타일은 다르다. 그쪽 제작사쪽에서 걱정을 해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웃으면서 그랬다. <굿바이 레닌>이든 <간큰가족>이든 <비단구두…>든 분단이라는 현실을 충실히 다룬 영화라면, 몇편이 나오더라도 그게 뭐가 대단한 걱정거리냐고 말이다.
-앞으로 남은 문제가 있다면.
=1억5천만원 정도 투자를 더 유치해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30회차 잡고 플러스 1억원이 있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빡빡한 촬영 진행하느라 여분의 투자를 유치하지 못했다. 스탭들과 배우들 모두 제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개런티를 양보했고 지금까지 왔지만, 나로선 촬영 끝내면 가편집본 들고서 투자 유치 설명회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저예산 영화 제작을 계속할 생각인가.
=아마도. 내가 생각한 것들을 가장 자유롭게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문제가 남긴 하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