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분들 이제 나와주세요. 다음은 일간지 기자분들 차례입니다. 그 뒤가 전문지니까 준비해주세요.” 3월의 마지막날 파주 아트서비스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친절한 금자씨>의 현장 풍경은 매우 낯설었다. 200명 가까운 취재진이 몰린데다 촬영이 좁은 세트장 안에서 이뤄진 탓에 주최쪽은 분야별로 조를 나눠 촬영을 허용했다. 2시30분쯤 일본과 홍콩 취재진을, 그로부터 1시간쯤 뒤에는 한국 취재진을 세트 안으로 ‘입장’시켰고, 국내 촬영진은 방송, 일간지, 전문지, 인터넷 매체로 세분해 현장 촬영을 허용했다. <대장금>이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홍콩의 15개 매체에서 온 40명의 기자와 일본 기자 70명, 국내 기자 80명이 뒤엉키는 상황을 막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각각에 배정된 시간이 너무 짧다보니 “현장 공개라기보다는 이벤트 같다”는 불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날 촬영분은 주인공인 금자(이영애)가 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감방 동기의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는 대목. 총 150신 중 11번째 신이니 영화에서는 초반에 해당한다. 이중 취재진한테 공개된 장면은 금자가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올리는 한신, 아니 한컷이었다. “나를 죄인으로 만든 그놈을 찾아 복수하게 해주세요”였을까. 영화 내용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탓에 금자가 기도하는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연기하는 이영애의 태도는 경건했다. 하지만 금자가 잠옷 삼아 입고 있는 ‘미아리 텍사스’풍 드레스와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벽지가 결합되다보니 묘한 대조의 긴장과 함께 웃음까지 스며나왔다. 박찬욱 감독은 이영애에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연기를 요구했다.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만 모니터 속 이영애는 고개를 돌리는지 어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는 와중 “이제 모두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해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장을 좀더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13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한 금자가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리는 <친절한 금자씨>는 4월 말쯤 촬영을 마치고 7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박찬욱 감독 기자회견
“이 영화는 이영애를 위한 영화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이영애와 다시 만났다.
=<…JSA> 때는 남자 4명이 함께 있어 이영애의 매력과 능력을 깊이있게 파고들어갈 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보면서 이영애에게 매료됐고 한번 더 기회가 오기를 바랐다. 이 영화는 이영애를 위해 기획되고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영애가 갖고 있는 여러 복잡한 내면 풍경을 끝까지 파고들려는 작품이다. 이영애는 여태까지와 다른 많은 것을 시도해야 했는데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왠지 조용하고 얌전해 보여 그런 연기만 할 것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보는 사람이 놀랄 만큼 섬뜩한 장면도 잘 소화하고 아주 우스꽝스런 장면도 해낸다. 이영애는 무엇을 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영애를 어떻게 캐스팅했나.
=<효자동 이발사> 시사를 같이 보고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하고픈 마음을 내비쳤고 이영애는 좀 새롭고 독특한 영화를 하고픈 눈치였다. 저예산 인디영화도 하고 싶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마침 <복수는 나의 것>을 아주 재밌게 봤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건넸는데 성공했다.
-또 복수극이다. 왜 복수극인가. 이번으로 복수극은 끝인가.
=복수라는 게 사회적으로 금지돼 있다는 점, 그러니까 사적인 보복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매력을 느낀다. 사회에서 금지된 게 여러 가지 있지만, 사람들이 일상에서 가장 큰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복수인 것 같다. 그렇게 생활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인데 엄격히 금지돼 있으니 자꾸 다루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복수극은 일단 3부작으로 완료할 생각이다. 이 영화 이후 최소한 2∼3 작품은 복수극이 아닐 것 같다.
-목표 등급은.
=15세 관람가다. (기자들 일제히 웃음) 내가 이런 말 하면 아무도 안 믿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래픽한 폭력 묘사는 별로 없다. 사실 고민했던 부분인데, 여주인공의 복수극이고 더구나 이영애라면 더 잔인하고 무섭게 폭력을 사용해야 더 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더관심을 끌지는 몰라도 너무 선정적인 태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에 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직접 묘사하는 대목은 많지 않다. 12세 관람가로 넣었다가 15세를 받으면 승복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 같다. (웃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에 이런 자리에 앉으면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라든가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여러 명과 함께였다. 이렇게 달랑 둘이서 하려니 외롭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영애라는 배우에게 집중하는 영화다. 거의 모든 장면에 이영애가 나오게 되는데, 한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잘못하면 단조로워질 수도 있는 탓에 이를 극복하고 좀더 복잡함을 갖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영애 기자회견
“나도 모르던 내 모습, 낯설고 놀랍다”
-금자라는 캐릭터를 설명해달라.
=금자는 13년 동안 자신을 복역하게 한 남자를 상대로 처절하게 복수하는 인물이다. 금자는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복잡하고 재밌는 캐릭터다.
-육체적으로도 고생스러웠고 심리적으로도 어려웠을 것 같다.
=육체적으로 물론 힘들다. 복수 3부작의 이전 작품에 비하면 여배우라 약한 게 있지만 액션신이나 강한 부분이 힘들 것이라 애초부터 예상은 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예상 이상으로 힘들더라. 심리적으로는 전작의 훌륭한 배우와 작품성을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 힘들다. 사실, 여배우로서 이런 작품을 만나기란 힘든 일이다. 다 감수하고 공부하면 힘든 만큼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90% 가까이 찍어가다보니 그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박찬욱 감독은 어떻게 평가하나.
=나 또한 <…JSA>를 하면서 박 감독과 많은 교류를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섬뜩했지만 너무 좋았다. 그렇게 감각적인 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운이 좋은 것 같다. 박 감독은 무엇보다 박식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이끌어주고 있다. 주저하거나 꺼리게 되는 부분도 무조건 감독을 믿고 한다. 한마디로 믿음직스런 분이다.
-최민식과 호흡을 맞췄다.
=한마디로 너무 재미있었다. 대선배라서 긴장했는데, 심지어 친구같이 재밌게 해준다. (박찬욱 감독이 거들어) 이영애가 최민식을 때리는 장면이 있었다. 이영애가 주저하고 있는데 최민식이 “하나도 안 아파, 마음껏 때려”라고 했다. 촬영 도중 쉬는 틈에 최민식에게 살짝 물어보니까 죽겠으니까 빨리 끝내달라고 하더라. 이영애의 손이 맵다면서.
-그동안 촬영한 분량 중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면.
=떠오르는 장면? 너무 많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떠오른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낯설고 너무 놀랍다. 그만큼 보람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