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블루>의 즈비그뉴 프라이즈너(Zbigniew Preisner)
1996-12-10

‘영화에 사용된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들까?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교도소 방송 스피커를 통해 틀어 주는 모차르트 의 오페라 아리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지옥의 묵시록>에서 헬기로 마을을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바그너의 ‘발퀴레 의 기행’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지면을 몇 회는 다 채울 만큼의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클래식 음악, 정확하게 서양 예술 음악은 그 자체가 영 화음악에 쓰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클래식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화 음악을 작곡함으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사실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음악은 어딘가 있을 법한 클래식 음악이다. 단지 지금은 죽어 그 이 름만으로 남아 있는 작곡가의 음악이 아닐 뿐이다. 물론 음악사에 그 이 름이 쟁쟁하게 거론되는 작곡가가 살아 생전 직접 영화음악을 작곡한 경 우도 있다. 에이젠슈테인과 <이반 대제> 등을 공동작업한 프로코피에프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 외에 한스 아이슬러, 레오나드 번스타인도 있다.

그런데 음악사에는 전혀 흔적도 없는 네덜란드의 작곡가 ‘반 덴 마이어 ’(Van den Mayer)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몇 곡이나 작곡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음악과 이름만이 남아 있다. 그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면, 이미 들어봤을지도 모르지만, 키에슬 로프스키 감독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세 가지 색-블루>를 보면 된다. 베로니카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다 죽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연주하고 있던 음악이 반 덴 마이어의 ‘협주곡 마 단조’이다. 이 곡은 프랑스의 베로니크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연주시키는 ‘오래된 음악’ 이기도 하다. <블루>에서 나오는 오케스트라 혹은 오르간 연주의 ‘장송 곡’ 역시 반 덴 마이어의 음악이다. 음악 어법으로 그의 연대를 추정해 보면 고전주의 시대, 늦춰 봐야 낭만 중기 시대이다. 더 늦춰 본다면 19 세기 국민주의 음악까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협주곡 마 단조’는 성악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으로 무척이나 아름답고 선율적이며 또한 장 중하다. ‘장송곡’ 역시 그 음악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소개한 두 영화의 전체 음악은 즈비그뉴 프라이즈너(Zbigniew Preis ner)라는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가 담당하였다. 프라이즈너는 이 외에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1984년 이후의 거의 모든 작품- <사랑에 관한 짧 은 필름> <십계> <세 가지 색> 시리즈- 의 음악을 맡았으며, 폴란드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랜드의 <유로파 유로파> <올리비에 올리비에> <비밀의 화원>, 루이 말의 <데미지>의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다. 지난 호의 한스 짐 머와는 달리 그는 다른 사람의 곡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두 자신이 직 접 작곡하는데 예외가 바로 반 덴 마이어다. 그러나 이 예외도 사실은 예 외가 아니다.

이제 사실을 밝히자. 반 덴 마이어는 바로 프라이즈너 자신이다. 프라이 즈너는 왜 그랬을까?

국내에도 프라이즈너 음악의 애호가는 상당히 많다. 선율의 유장함, 사람 목소리의 효과적인 사용, 클래식 음악만을 고집함으로써 갖는 음악 내외 적인 고상한 이미지 등이 프라이즈너 또는 반 덴 마이어의 인기를 부분적 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평하기에는 키에슬로프스키는 너무 거장이다. 그러나 그의 <십계> 이후의 영화들 <베로니카…> <세 가지 색>에서 음악이 과연 영화 전반을 감당해 내고 있는지 또는 영화에 도움 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는 인간의 본성, 신성(神性)을 대치하는 인성(人性)의 보편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특히 <세 가지 색>에서는 통합을 앞 둔 유럽에서 요구되는 비 정치적인 이념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바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영화에 프라이즈너는 이름까지 바꿔 가며 고색 창 연한 클래식 음악을 결합시켰다. 르네상스 이후 음악 역시 그 이전의 종 교음악과는 달리 인성(人性)이라는 주제에 몰두하였으며 이는 고전, 낭만 시대를 거쳐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완성된 클래식 음악은 과 거완료형이며 따라서 그 음악은 특정한 의미를 갖는 일종의 기호로 작용 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산업사회 이후의 새로운 인간성을 표현하려 달 려가고 있는데 음악은 산업사회 이전에 이미 결론난 것으로 회귀한다면 그 둘의 결합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문제를 느꼈기에 서 구예술음악의 일반적 방향을 뒤집으려는 것이 기본적인 프라이즈너의 생각일까?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미 죽었고 프라이즈너는 아직도 살아 있다. 더군다나 프라이즈너는 어려서부터 만들어진 음악인이 아니라 대학에서 역사와 철 학을 전공하다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다. 오히려 앞으로의 작품 이 그의 영화음악가로서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그러 나 그가 참여한 영화 중 유일하게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비밀의 화원> 에서 그의 고집은 흔적만 남은 채 희석된 것을 보고 그 자신 역시 하나의 박제품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송현주/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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