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21세기가 원하는 천사의 얼굴, <신 시티>의 제시카 알바
2005-04-14
글 : 김혜리

에로틱하고 폭력적인 만화에 탐닉하고 밤이면 사나운 몽상에 뒤척이는 10대 남자애들에게 연필을 쥐어주자. 그리고 환상의 여자 친구를 그려보라고 속삭이자. 몇분 뒤 당신의 손에는 아마도 제시카 알바(24)와 몹시 닮은 소녀의 초상화가 들려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오목하고 볼록하고 터질 듯하다. 도도한 눈동자, 금세라도 토라질 듯 도톰한 입술, 모카빛 윤기가 흐르는 동그란 어깨, 쿨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경멸로 살짝 이지러진 눈썹. 제시카 알바를 이루는 모든 곡선은, 호르몬을 주체 못하는 소년들의 기도에 대한 천상의 응답이다. 만화가 약속한 판타지를 한치 오차없이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탐욕스런 10대 마니아들을 상대해야 할 <신 시티>와 <판타스틱 포>의 영화제작자들이 제시카 알바를 ‘최종병기 그녀’로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블론드의 야망’(blond ambition). 15년 전 마돈나가 그녀의 투어에 붙였던 타이틀은 제시카 알바의 2005년을 요약하기에도 적당한 말이다. 까만 머리칼을 금발로 물들인 알바는 지난 4월1일 박스오피스 정상에 데뷔한 <신 시티>에 이어 7월 초까지 해양액션영화 <인투 더 블루>,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 <판타스틱 포> 등 출연작 3편을 연달아 개봉한다.

<신 시티>에서 알바가 분하는 낸시 캘러한은 천진한 스트리퍼다. 카우 걸 차림으로 밧줄을 휘두르고 금발을 후광처럼 흩날리는 그녀는 부패와 유혈의 악취가 흥건한 소돔에서도 자기의 내면만 바라보기 때문에 순수를 지탱할 수 있는 여자다. 어떻게 춤 연기를 준비했냐고 묻는다면 알바는 아마 웃어댈 것이다. 나이 많은 남자친구 마이클 웨덜리(<다크 엔젤>의 로건)와 헤어진 이유의 하나가 춤추러 외출하고 싶어하는 그녀와 흔쾌히 동행하지 않아서였다니까. 그래도 알바는 자만하지 않고 미국 전역의 스트립클럽을 성실히 견학했다고 하니, <신 시티>를 연출한 로드리게즈 감독의 전작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샐마 헤이엑이 선사한 압도적 황홀경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설렐 만하다.

한편 <판타스틱 포>의 수 스톰은 섹시하면서도 팀의 갈등을 조정하고 보살피는 모성을 지닌 슈퍼히로인. 우주 탐사 프로젝트의 사고로 초능력을 얻은 비행사팀의 홍일점 스톰은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에너지장을 형성하는 능력을 얻는다. 제시카 알바를 기껏 캐스팅해놓고 투명인간이라니 무슨 바보짓인가 싶지만, 알바는 스톰의 캐릭터가 대가족 집안에서 열네명이나 되는 사촌의 맏이로 중재자 노릇을 하며 자란 자신에게 제격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출세작은 종종 배우의 일생에 달라붙은 희미한 예언이 된다. 스타 제시카 알바는 아직 <다크 엔젤>의 자장 안에 있다. <신 시티>와 <판타스틱 포>에서 알바의 역은 TV시리즈 <다크 엔젤>에서 그랬듯 구원자이며 치유자인 일종의 ‘천사’다. 그녀에게서 대중은 21세기가 원하는 천사의 얼굴을 본다. 멕시코, 프랑스, 인도, 스페인, 덴마크의 혈통이- 마치 전세계 네티즌이 마우스로 합성한 사이버 스타처럼- 절묘하게 칵테일된 그녀의 외모는 세계 시민사회의 행복한 꿈이 실현되는 미래에 우리가 숭배할 법한 우상의 그것이다.

스트리퍼의 브라톱, 스쿠버다이빙복, 슈퍼히어로의 스판덱스…. 몸에 붙는 의상만큼이나 알바를 조여들어오는 것은 판박이 캐스팅의 압박. 하지만 그것은 이사와 전학이 반복되는 군인 가정에 태어나 “좋아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에 대한 통제력을 찾는 수단으로” 연기를 시작한 알바에게 질 수 없는 싸움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모두가 가짜고 책략을 쓰며 신의가 없다. 그런데 로드리게즈 감독은 다르다. 그는 사람을 학대하거나 이용하지 않는다”는 알바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대목도 로드리게즈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나머지 다수에 대한 환멸이다.

제작자가 될 계획까지 밝힌 알바는 <다크 엔젤>의 대사처럼 “이상하고 자그마한 나의 삶”을 지키는 일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그러기 전에 올 여름 그녀는 전세계 남자들의 심장에 밧줄로 올가미를 거는 손쉬운 작업부터 해치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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