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노아 대지를 피폐화시키고 백성들을 절망에 빠트린 ‘뱅쿠 전쟁’. 산고트 왕과 그가 이끄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전란을 종식시킨 전사 오르트루드는 이후 성왕이라 불리며 두한 왕국을 치세로 이끌게 된다. 허나 평화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법.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수수께끼의 마녀 아우로라는 두한 왕실에 저주를 내리고, 불현듯 생겨난 미궁은 왕국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죽음의 함정, 끝을 알 수 없는 미로로 이루어진 칼만의 미궁. 왕국의 정예 기사단도 속수무책인 그곳에 일군의 모험자들이 나타난다. 마녀의 저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왕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국을 구하는 자에게 큰 포상을 약속한 것이다. 자, 그대 역시 부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지 않겠는가.
<부신 제로>는 한글화된 정통파 스타일의 던전 탐험 RPG로 최근 주목 받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2용 게임이다. 던전 탐험 RPG가 어떤 것인지 우선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면, 여럿이 협력해 각자 역할 분담을 맡아 진행하는 보드게임 ‘던전 앤 드래곤’을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와 성공한 <위저드리>에서 유래된 방식이다. 게이머들을 복잡한 미로 속에서 괴물들과 싸우게 했던 이 게임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입체감과 몰입감으로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RPG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RPG <디아블로> 역시 자동으로 그려지는 지도를 보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위저드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울티마> <마이트 앤 매직> 등 비슷한 장르의 걸작들 함께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위저드리>의 인기는 일본에까지 미쳐, 마니아들을 사로잡은 <여신전생> 시리즈가 나오는 계기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게임들이 선을 보이면서 롤플레잉 장르가 원산지인 구미쪽에서는 퇴조한 반면, 일본에서는 수백만장씩 팔려나가는 히트 장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롤플레잉 게임 자체도 액션, 시뮬레이션 등 타 게임 장르의 요소를 도입하고 3D 그래픽을 강화해, <파이널 판타지> <디아블로> 등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게임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부신 제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롤플레잉 게임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위저드리>의 대안(얼터너티브)임을 표방한 게임이다. 같은 3D 던전 탐험 방식의 <진 여신전생>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의 게임 개발자 오카다 코지가 제작했는데, 그는 현대적인 <진 여신전생>과 달리 전통적인 중세 유럽풍의 배경에 일본적인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위저드리>를 탄생시켰다.
간단히 말해 <부신 제로>는 매우 구닥다리같은 게임이다. 게임의 배경을 설명하는 프롤로그 화면이 지난 뒤 게이머가 마주대하는 것은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이정표만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마을, 그리고 대화는 하지만 입도 벙끗 안하는 일러스트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이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테라다 카츠야의 작품이라서 그럴싸한 분위기는 나지만 어딘지 고전 게임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대화를 통해 마을의 흉흉한 소문을 듣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를 모은 뒤, 전투에 필요한 채비를 하고 게임의 주무대인 던전에 들어가보자. 음산한 배경의 3차원 공간이 펼쳐지는데 어딘지 불편한 느낌이 든다. 주위를 둘러볼 수는 있지만 오직 전후좌우 네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배경만 3D CG로 이루어져있을 뿐 3차원 공간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최신 게임들에 비해 갑갑하기 그지 없다. 전투방식도 마찬가지. 적과 조우하여 전투에 돌입하면 괴물들과 공방전을 펼치게 되는데, 지정하는 패턴에 따라 내가 한대 치면 적이 한대치는 고전적인 턴방식일뿐더러 휘두르는 무기만 보일 뿐, 주인공과 그를 따르는 동료들(‘파티’라고 한다)의 모습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한 화면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불평부터 늘어놓았는데 그렇다면 이 게임은 비추인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꼭 한 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게임이다. 단, 느긋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 사실 이 게임의 난이도는 어려운 편이다. 캐릭터간의 상성과 특수능력, 전투배치 등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파티를 운용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전멸당하기 때문이다. 힘겨운 전투를 몇차례 마치고 마을에 돌아오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 경험치에 따라 캐릭터의 능력이 상승하고, 만약 의뢰를 받았던 임무를 수행했다면 희귀한 보물이나 무기를 얻게 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파티를 강화해 다시금 던전에 돌입하면 게임이 한결 쉬워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슬슬 던전 탐험의 매력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물론 한층 더 지하로 내려가면 더 강한 괴물과 함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주목해야할 것은 진행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어레이드 액션’이다. 이것은 이 게임의 최대 특징으로서 전투를 더욱 수월하게 하고 박진감 있게 만드는 열쇠가 된다. 전투에 임한 캐릭터들의 협력을 통해 집단 공격이나 방어, 혹은 견제를 하는 기술인데, 게임의 스토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점점 강해지는 적들에 대비하기 위해서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잘만 하면 적들을 단숨에 몰살시킬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적들도 어레이드 액션을 펼치기 때문에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면 막심한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금씩 게임을 진행해 나가다보면 어느덧 몰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게임의 주무대인 칼만의 미궁은 사악함이 감도는 던전이다. 왕국의 평화를 위해 그 수수께끼를 파헤쳐야 하는 것이 모험자로서의 의무지만, 어느덧 그 던전 자체에 매혹되는 사람들 또한 부지기수라고 한다. 아마도 이 게임을 붙잡은 누구나가 한번쯤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고전적인 스타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신 게임에 익숙한 사람은 처음에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참고 몇 시간만 투자해보기 바란다. 그에 따른 보상은 반드시 있으니까 말이다.
원제 : Busin 0 - Wizardry Alternative Neo
장르 : 롤플레잉
플레이 인원수 : 1인
기종 : 플레이스테이션 2
배급사 : 손오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