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버지 명연기 3인 3색 [2] - 신구
2001-07-13
글 : 박은영
사진 : 오계옥
측량불가능한 연기의 너비, 배우 신구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

산처럼 커다랗던 아버지가 그렇게 작고 늙고 무력해 보일 수가 없다. 자식들은 그게 원망스럽고 또 화가 난다. 아버지를 남겨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아들은 아버지 혼자 소일할 수 있도록 비디오 작동법을 가르쳐주지만, 아버지가 간단한 매뉴얼을 이해 못하자, 버럭 화를 내고 방을 나간다. 그러나 아버지는 안다. 죽음을 앞둔 아들이 소리 죽여 우는 울음을 알고(), 한심한 짓만 골라 하는 아들이 둘러대는 거짓말을 알고(<반칙왕>), 화학 조미료와 캐러멜이 판치는 세상에서 지켜나가야 하는 진정한 맛을 알고(<북경반점>), 참교육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의 애환을 알고(<학교>), 사네 못사네 갈등하는 부부들이 모르는 세상사의 도리를 안다(<부부클리닉>). 아버지는 모든 걸 알고 계시고 또 품어 주신다. 감정의 기복을 읽을 수 없는 무심한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는 자칫 헤프게 터져나올 사랑을 단속하기 위한 것일 뿐. 어리고 약한 자식들이 기댈 품은 여전히 넉넉하다. 바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서 있는 연기자 신구(65)씨의 모습이다.

문제적 할아버지에서 메피스토텔레스까지

그런데 신구씨가 요즘 변했다. 일일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 그는 어린 손주보다 철딱서니없는 행동을 일삼는 ‘문제적’ 할아버지 노구를 연기하고 있다. 동전 따먹기를 하면 아들 앞에서 동전을 입에 숨기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고, 망가진 색소폰을 주워 왔다는 타박에 색소폰으로 물도 퍼담고 마늘도 빻으면서 억지로 쓰임새를 만들어 맞서고, 콜라 사달라는 사소한 부탁을 무시한 며느리에게 삐쳐서 친구와 일본어로 흉을 보는가 하면, 사심없는 설거지의 대가로 돌아온 용돈 때문에 매일 설거지를 하며 ‘용돈 지급의 법칙’을 고민한다. 일상에 만연한 부정부패의 주범이고 천방지축 트러블 메이커이지만, 그만큼 인간적이고 순수해서 사랑스러운 인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조금 과장된 모습이다. <웬만해선…>의 제작진은 펄떡거리며 생동하는 신구씨의 연기로 거듭난 노구의 인기가 높아지자, 노구에 관한 에피소드를 늘려가는 중이다. “노구는 말야, 슈퍼맨이야, 슈퍼맨. 안 되는 일이 없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잖아. 재미있는 게, 그 사람을 통해서 갖가지 사회비리들을 꼬집어 말할 수가 있거든.” 그리고 또 한번의 변신. 류승완 감독의 신작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는 “겉모습은 인자하지만 속은 시꺼멓다”는 투견장 주인 김근복(일명 KGB)을 연기한다. 시트콤의 코믹 연기도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더욱이 이번엔 오랜만에 맡은 악역이라 신구씨는 잔뜩 신이 난다. “매번 다른 걸 할 수 있어야, 그래야 배우지.”

이런 변신은 신구씨의 연기 스펙트럼이 측량 불가능할 정도로 넓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떠올리던 근엄한 아버지나 지혜로운 도인의 이미지는 그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는 40년 동안 무대를 지켜온 신구씨의 깊고도 다양한 경험, 그의 ‘장인정신’과도 맞닿는 대목이다. 신구씨와 함께 <파우스트>를 무대에 올렸던 연극 연출가 이윤택씨는 저서 <살아있는 동안은 날마다 축제>에서, 신구씨를 주저없이 “당대 최고의 메피스토텔레스”라고 칭하고 있다. “인간이 악마일 수 있다고 연상한다면, 바로 신구 선생의 연기”라는 것. 이윤택씨는 또 가극 <눈물의 여왕>에서 빨치산 대장으로 잠시 등장했던 신구씨의 연기가 극 전체를 흔들어놓을 만큼 압도적이어서, 결과적으로 빨치산 대장을 미화시켰다거나 좌익편을 들었다는 오해도 샀다고 회고하고 있다. “내가 전에는 부정적인 역할도 많이 했다구. 간첩이나 악마 역할도 했거든. 젊어서도 멜로는 못했어. 그 주변의 까맣고 빨간 인물들이 내 차지였지. TV로 오면서부터 아버지나 아저씨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그게 좀 일렀고 그만큼 오래 지속된 거야. 아버지 역할이야 노름꾼이나 주정뱅이 아니고서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 거니까.” 그러면서도 신구씨는 자기 분신으로서의 아버지 역시 색깔이 다르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재벌 사장이나 번듯한 집안 출신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어. 시골 영감 아니면 도시 빈민이야. 뭐, 내 꼬락서니가 그러니까.(웃음)” 그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배우로 그친 것이 아니라 소시민의 정서와 애환을 오롯이 풀어내는, 민초들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감정의 억제가 뿜어내는 연기의 밀도

“어차피 자기가 아는 인물을 연기하는 거야. 배우가 자기를 벗어나서 어떻게 연기를 해. 모양새나 색깔을 달리할 수는 있겠지만. 내 살아온 경험이 연기에 다 나오는 거지. 그래서 배우의 학식이나 품성이나 생활 반경이 중요한 거야." 자신의 분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자신을 소개한 신구씨의 배우 데뷔담을 듣는 건 그러나, 수월치 않았다. 기억 속에서 가물거릴 만큼 오래 된 일인데다, 굳이 내세울 얘깃거리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뜻인 듯했다. “극히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는 신구씨는 한때 아나운서를 꿈꿨다고 했다. 그런 그가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은 60년대 드라마센터가 개관되면서부터다. “자기 표현을 하기에는 언론쪽보다 연기가 더 적극적이고 맛도 있겠다 싶었지.”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시작한 뒤로, 유치진 선생이 설립한 연극아카데미(서울예대 연극과의 전신)에서 전무송, 이호재씨 등과 연기 이론과 실기 수업을 받았다. 당시 연출자로 기억된다는 김정옥(현 문예진흥원장)씨의 강의는 신구씨에게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믿음을 심어줬다. “감정 폭발보다는 억제가 더 중요하다, 그게 더 밀도있게 전달된다는 얘기. 난 지금도 연기할 때마다 그 생각을 해.” 오태석의 <루브>, 유덕형의 <생일파티>, 이윤택의 <파우스트>는 신구씨가 꼽는 대표적인 연극 작품. <허생전>으로 TV 진출한 뒤 <야간비행>으로 인기를 모았고, 이두용 감독(<홍의 장군>)이나 김기영 감독(<파계>)과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신구씨에겐 아직도 “사람 냄새 나는” 연극 무대가 편하다. 배우는 어디에 가든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연기는 다 같다”는 지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어디 가서 뭘 연기하든 바탕은 진실이야. 그 위에 다른 요소들을 얹되, 감정은 눌러야 해. 진실이 없으면 공허하고, 감정이 과장되면 역겨울 수 있거든.”

돌아서야지, 기웃거리지 말고

신구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좀체 보지 않는다. 도 <반칙왕>도 아직 안 봤다. “아쉽다고 고쳐지나. 보고 있기 쑥스러워. 그런데 요즘 젊은 감독들 참 진지하고 감각 있대. 고민도 많이 하고. 워낙들 조용해서 옆에 있어도 말소리가 잘 안 들려.” 어느새 함께 작업하던 감독이나 PD들이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이제 낯선 젊은이들 천지다. 어느 현장에서든 최고참 어른이라는 사실에 대해 신구씨는 “이제 쓰임새가 적어진다는 얘기”라는, 쓸쓸하고도 자조적인 해석을 참으로 덤덤하게 내놓았다. “능력이 안 되면 돌아서야지, 기웃거리지 말고.” 이날의 결론이 이렇게 우울했느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신구씨는 하루 8km씩 뛰거나 걸으며 체력을 다지고, 대본이 나오면 붙들고 씨름하기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때론 앞서 나갈 수도 있다는 것.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 인터뷰와 사진 촬영이 늘어져 <부부클리닉> 촬영에 늦겠다며, 발길을 재촉하는 신구씨의 뒷모습에 햇살이 반짝 반사되고 있었다.

내가 본 선배 신구

“존경하는 선배 1순위’”

확신하건대, 지금 활동중인 남자배우들에게 존경하는 선배를 꼽으라면, 신구 선생님이 1순위일 거다. 평소 존경해온 선배님을 내가 주연인 영화(<반칙왕>)로 처음 뵈었을때, 송구스럽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해서 무척 떨었고 연습도 간신히 마쳤던 기억이 난다. 한 무대에 선 적은 없지만, 언젠가 극단 무천의 작품을 보면서 무척 놀랐다. 무천은 젊은 사람들도 지쳐 떨어질 만큼 연습을 많이 시키는데다 힘이 많이 드는 작품들만 골라 하기로 유명한데, 2시간 내내 무대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걸 보고 놀랐다. 영화를 같이하면서 옆에서 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너무 웃어서 NG를 낼 때도, 컷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는 웃으시는 법 없이 진지하셨다. 대사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느낌까지 전달하실 뿐만 아니라, 역할과 상황을 완전히 ‘자기화’하실 줄 아시더라. 감독과 작품 스타일을 빨리 간파하시고, 자유자재로 맞춰나가시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송강호(배우)

시트콤은 애드리브 연기에 능하고 코믹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들에게 유리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도식적으로 흐르기 쉽다. 본인은 심각하고 상황이 코믹할 때, 진지한 연기를 지향할 때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연기자가 코미디를 잘 알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신구 선생님이 딱 그런 경우다. 오지명 선생님이 갑작스러운 애드리브로 ‘예측불허의 코미디’를 선보이셨다면, 신구 선생님은 대본에 충실하면서 그 맛을 잘 살리는, ‘준비된 코미디’를 하신다. 과잉되는 느낌이 없어서 순수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웃기려는 의도를 감출 줄 아는, 진짜 ‘선수’시다. 김병욱(<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PD)

개인적인 인상이긴 하지만, ‘품이 넓다’, ‘널럴하다’는 느낌을 주는 분이다. 활동중인 60대 배우가 거의 없는데, 평생 동안 무대를 지켜 오셨고, 지금도 여전히 무대에 설 수 있는 배우라는 점에서 선생님의 존재가 매우 귀하게 느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독특한 호흡이 주는 매력이 있으시고, 작품 분석력이 아주 좋으시다. 머리를 많이 쓰는 연기를 하신다고 할까. 순간순간의 위기를 잘 처리하는 순발력과 지혜도 갖추고 계시다. 김광림(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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