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아버지 없이 살았다. 청춘남녀가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하는 영화에는 아예 가족이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족속들. 멜로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 그렇다. 다른 장르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아버지가 잘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이른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세대별 캐릭터를 하나씩 끼워넣을 때 등장하는 식이거나, 가족드라마를 표방하는 극 속에서도 주물을 뜬 것처럼 늘 똑같은 모습과 이미지로 반복 재생됐다. 그렇고 그런 아버지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 필요했을 뿐이지, 배우들의 이미지나 연기력이나 카리스마에 기댄 아버지 캐릭터가 나고 자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요즘은 든든하다. 독특한 아우라가 있는 세분의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신구, 주현, 박인환. 엔딩 크레디트에 번듯한 이름도 없이 그냥 ‘아버지’로 오르곤 하는 이들은 아버지이되, 그냥 아버지가 아니다. 최근 이들이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다른 배우의 대입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각기 고유한 맛과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신구씨는 아버지라는 캐릭터 안에서도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색깔을 보여주는 배우다. 에서 죽음을 앞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안으로 삭이던 아버지이다가, <반칙왕>에서는 소심한 아들에게 면박주고 야단치기를 서슴지 않는 다혈질의 아버지로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스스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서는 한국 드라마사상 가장 철없고 귀여운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거구에다 조금 우악스러워 뵈는 인상의 주현씨는 <친구>에서는 깡패를 가업으로 전수한 비운의 아버지로, <해피엔드>에서는 실직 가장의 안식처인 헌책방 주인으로 잠깐 출연했지만 길고도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TV에서 종종 보듯이, 강한 인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코믹하고 로맨틱한 연기도 일품이다. <왕룽일가>의 고집불통 왕룽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박인환씨의 강점은 상상력이 번득이는 젊은 영화 속, 엽기발랄한 캐릭터에 쏙 어울린다는 것이다. 많지도 않은 투숙객이 줄줄이 죽어나가자 시체를 유기하고 시침 뚝 떼는 <조용한 가족>의 산장 주인이나, 북에서 막 내려와 혼란에 휩싸인 젊은 간첩을 보듬어주는 <간첩 리철진>의 고정간첩은 박인환씨를 통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는 칭송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개성과 매력의 소유자라는 점, 성격파 배우라는 점말고도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신구씨와 박인환씨는 연극 무대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했고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했다는 이력을 공유한다. 관객의 감정선을 읽어내고 제때 터뜨려줄 수 있는, 그들만의 독특한 직관은 오랜 무대 경험에 빚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현씨는 TV 토박이로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출발점이 어디든 특정한 영역만을 ‘내 무대’라 못박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드는 열린 마음만은 모두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 이들은 인터뷰 섭외를 받자, 약속이라도 한 듯 수줍게 고사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많잖아. 나이 든 사람 만나서 뭐하게. 할 얘기도 없어.” 바로 그 이유였다. 스크린과 브라운관과 무대를 지키고 있는, 건강하고 지혜로운 어른들. 우리는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TV 리모컨의 주인과 극장에 드나드는 관객의 연령이 점점 낮아져서인지, 연기자 사이의 세대 교체도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지켜보지 못하는 성질 급한 대중이 중견과 원로들을 밖으로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린 관객의 기호를 맞추는 창작자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늙기 전에 사라져버린 배우들이 모두 대중의 변덕에 희생됐다고 볼 수는 없다. 자기 관리에 게을러 스스로 명을 재촉한 배우들도 적지는 않은 것이다. 이들 아버지 3인방의 최고참인 신구씨는 배우들이 쉽게 조로하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우리 나이, 50대나 60대면, 한참 농익은 연기가 나올 때다.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간 건가. 왜 다 사라지고 없나.” 풍토의 문제이든 배우 개인의 문제이든, 현장에서 어른들이 사라져버린 게 사실이다. 어른의 존재가 새삼 귀하고 반가운 건 그런 이유다. 신구, 주현, 박인환. 이 세분만큼은 앞으로 더욱 목소리 높여 스크린 안팎에서 아이들의 철없음과 게으름과 무지를 나무라주시길, 더러는 상처받고 지친 어린 영혼들을 따스히 품어주시길, 기대해 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