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서로 상대방의 영역을 침입하는 행위다. 눈이 내리던 어느 날 그녀가 그의 트럭 안으로 대뜸 찾아가자, 무지렁이로 보이던 남자는 주간지에 글을 쓴다는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야기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이브레이터>는 클레르 드니의 <금요일 저녁>을 기억하게 한다. 여류작가가 원작을 쓴 두 영화는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살을 나누는 이야기, 따스한 체온이 전달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이브레이터>의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낸 뒤 트럭을 타고 같이 길을 떠난다. 도쿄에서 추운 나라 니가타로, 그리고 다시 도쿄로. <바이브레이터>를 그냥 로드무비가 아닌 서른한살 여자의 마음의 여행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의 모놀로그와 둘의 대화와 화면에 간혹 떠오르는 자막이다. 그녀의 고통이 언뜻 보이고, 둘의 감정이 빛날 즈음 <바이브레이터>는 거기서 문득 끝난다. 유한한 육체와 언젠가는 끝날 그 길과 둘의 관계처럼. 빛은 곧 사그라지지만 그 빛을 발하는 따스한 불은 영원한 법이다. 아마도 빛이 아닌 불이었을 그는 그녀의 몸 어딘가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많은 수의 동시대 일본 감독이 그렇듯이 히로키 류이치도 핑크 무비로 연출을 시작했다. <바이브레이터>는 그런 그가 여자의 몸을 탐하기만 했던 감독이 아님을 보여준다. 제작현장과 인터뷰로 구성된 메이킹 필름, 관객과의 대화, 영화제 참가 기록 등의 부록은 가볍게 볼 수 있는 것들이며, 별도 디스크로 제공되는 O.S.T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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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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