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남극일기> 제작기 [3]
2005-05-10
정리 : 오정연

5% 모자라지만 뉴질랜드여, 안녕

8월24일/ 한국행 비행기 안

눈이 녹은 라이포드. 덕분에 계획했던 촬영 분향의 5%를 찍지 못했다.

결국, 뉴질랜드에서 촬영하기로 했던 장면 중 5% 정도를 찍지 못한 채 이곳을 뜬다. 변덕스런 날씨는 마지막 날까지도 우리를 괴롭혔지만, 키위들은 그래도 우리가 운이 좋은 편이란다. 이제 반환점을 돌았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뉴질랜드 촬영 쫑파티 때 NZFX의 제프와 한국쪽 특수효과팀 경수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환상적인 불꽃놀이가 떠오른다. <반지의 제왕>과 <라스트 사무라이>를 해낸 그들은 훌륭하게 남극의 자연효과를 재현해줬다. 타이틀 시퀀스에 들어갈 대원들의 행군장면을 헬기로 촬영할 때 오렌지색 구름 뒤로 모습을 보였던 무지개도 머리를 스친다. (봉)준호 형은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 본 무지개에 미신적인 기대를 가졌다는데. 나 역시 그 무지개를 행운의 무지개로 맘속에 새기고 있다. 그 행운이 앞으로의 촬영을 순조롭게 만들어주길 바라며, 뉴질랜드여… 안녕!

세트라서 쉬울 줄 알았더니…

9월20일/ 양수리종합촬영소

뉴질랜드 로케이션에서 우리 모두를 그렇게 괴롭히던 눈이, 이제는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의 촬영은 마음 편할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박살나고 있다. 아무리 세트 안이라지만 설정은 남극. 그 남극이라는 배경을 너무 만만히 보았던 것이다.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론 외계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언제나 예상보다 두세배의 준비가 필요하다. 양수리의 제일 큰 세트에는 100kW 이상의 거대한 조명을 설치하고, 엄청난 양의 눈을 매일같이 깔아야 하는데다가 어마어마한 스모그까지 사용하는 상황. 강풍기에 강설기를 돌리면서 스모그가 날아가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버리고 나니 마치 가스실 같다. 누군가 이 영화에 대해 <무사>와 <유령>을 합쳐놓은 정도의 고통스런 작업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소금으로 만든 눈 때문에 염분을 견디기 못한 조명기가 급기야 터져버렸다. 그 와중에 조명부 퍼스트는 예전에 자기가 했던 영화의 조명기가 터지고 나서 영화는 대박이 터졌다며 너스레를 떤다. 아, 나의 변덕과 집착을 언제나 묵묵히 소화해주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고의 퀄리티를 만들어주는 한국 스탭들이 너무 든든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몇몇 감독들과 제작자, 배우들의 공으로 얘기하지만, 스탭들의 뛰어난 역량이 없었다면 이 모든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수리 세트장 내부
지쳐 쓰러진 소금더미 위의 스탭들

“스트레스성 급성 당뇨네요”

11월 어느 날/ 서초동 모 내과병원

“당뇨네요.” 의사 선생님은 무덤덤한 어투로 설명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당뇨 같다는 설명에 성민 엄마의 눈시울은 붉어진다. 아직도 힘든 촬영이 남아 있는데 큰일이다. 며칠 전 수원 실내세트 밤샘 촬영 때도 위험하긴 했다. 콘티를 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뭘 어떻게 찍어야 할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일명 뇌의 ‘화이트아웃’ 상황. 30대 중반이 채 안 된 나이에 이러고 있다니, 한심하다. 사실 영화가 더 걱정이다. 예상했던 촬영기간이 벌써 오버된 탓에 다음 작품이 걸려 있는 일부 스탭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며칠씩 밤을 새서라도 일정을 맞춰야 하는데, 언젠가 차 대표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순간이 닥칠 거야. 그때, 잘 이겨내야 된데이~!” 지금이 바로 그 최악의 순간일까.

“힘내라 힘! 거의 다 왔다!”

12월3일/ 양수리 야외세트장

양수리 외부촬영

도달불능점 밤신을 촬영 중이다. 50m에 이르는 블루 스크린과 100t의 염전에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지인들이 보내준 격려 문자 메시지를 읽으며, 어떻게든 힘을 내보려 한다. “네가 가지고 있는 걸루도 괜찮으니까 안달복달하지 말고 즐기면서 찍어라”, “끝까지 하려고 했던 거 잊지 말고 홧팅!” , “힘내라 힘! 거의 다 왔다!”, “모든 의심을 결과로 증명했던 히딩크처럼, 빌리브 유어 셀프!”, “기운낼 소스가 없어도 자가발전 기운내길~ 화팅!”, “잘돼? 이젠 그저 악으로 찍는겨!”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정윤철, 김지운 감독들 모두가 한번 이상 세트장을 찾아줬다. 김지운 감독은 고급커피를 갖다줬고, (류)승완씨는 <주먹이 운다>를 촬영하던 와중에도 촬영장에 놀러와선 “영화가 너무 어두워∼”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공동 시나리오로 <남극일기> 크레딧에도 올라갈 준호 형은 두세번씩 세트장을 찾아서 함께 술을 마셔줬다. 함께 시나리오를 쓸 당시, 겨우 한신 써주고는 <우울한 편지>를 틀어놓고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정리하긴 했지만.

10년 전에 처음 알았을 땐 다들 우울했던 이들인데, 지금은 모두 잘 나가고 있는 모습에 뿌듯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자서전에서 말했던 힘들 때마다 도와주는 수호천사가 바로 이 사람들인 것 같다.

송강호 왈 “아∼ 그거 나도 빼고 싶었는데”

2월 어느 날/ 편집실

텐트장면을 위해 세팅된 현장

장장 9개월의 남극 오디세이가 끝났지만, <남극일기>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다. 갑자기 폭설이 쏟아지는 바람에 스탭 휴게실 안에서 찍었던 뉴질랜드 첫 촬영 분량을 결국 다 날려버렸다. 힘들어하면서 뒤에서 따라오던 재경이 결국 실종된 뒤, 텐트 안에서 대장인 도형(송강호)이 막내 민재(유지태)를 위로하는 장면인데, 한국에서 찍은 텐트 안 장면과의 연결이 아무래도 어색했다. 사실 연기는 별로 문제가 없었는데. 편집실에 들른 강호 형이 이 소식을 듣더니 “아∼ 그거 내가 그때부터 빼고 싶었는데, 속이 다 시원합니다”라며 술을 사겠단다. 강호 형은 편집실에 자주 찾아오면서도 어떤 장면을 자르지 말라는 말보다 빼달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역시 영화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아,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3월19일/ 라이브톤 ADR룸

송강호의 마지막 촬영

“전부 가만 있어∼!!!” 거대한 크레바스 속으로 성훈이 끌려들어간 뒤, 대장 도형이 대원들에게 소리치는 이 대사가 100테이크 만에 OK가 났다. 50여명의 기자들이 북적대던 현장공개날 찍었기 때문에 동시녹음을 할 수 없었지만, 현장의 긴박함이나 도형의 카리스마가 그대로 전달돼야 하는 중요한 대사다. 그날 가이드로 녹음했던 강호 형의 연기가 너무 훌륭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정도의 느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때 강호 형은 거의 초능력을 발휘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한 강호 형이 대여섯번이나 녹음실을 찾아서 매번 목이 쉴 때까지 녹음한 덕분에 결국 현장을 능가하는 느낌으로 녹음이 됐다. 그리고 이 녹음을 마지막으로 한달간의 길고 힘들었던 후시녹음도 끝이 났다. 강풍기와 강설기, 각종 효과들 덕분에 우리는 이미 오케이가 나 있는 현장녹음본을 절반도 쓸 수가 없었던, 고통스런 더빙이었다.

앞으로 CG와 음악, 믹싱이 남았다. 뉴질랜드에선 체중조절과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같이 20km가 넘는 야간 트랙킹을 자처했던 지태, 좋아하는 소주도 마시지 못하고 매일밤 숙소 앞 운동장을 50바퀴씩 돌았던 강호 형을 비롯해서 서울에 돌아와서 마지막 더빙까지 최선을 다해준 형들 모두 고맙기 그지없다. 정말로 이제 이들의 노력에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은 남은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이제 두달 뒤면 이 길고 길었던 여행의 결과를 모두와 나눌 수 있으리라.

아,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글 임필성/ 감독·사진제공 싸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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