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충무로의 섬, 독립영화의 대지, <섬>의 서정
2000-04-11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욕망’의 저수지를 찾는 낚시꾼들에게 커피와 실지렁이를 팔 듯 몸을 내주는 <섬>의 희진. 그녀의 얇은 갈색치마는 사내들의 배설물에 젖기 일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선 비린내가 요동한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섬에 정주해서 그녀를 약탈하는 이들은 유약하기 그지없다. 죽기 위해 섬을 찾은 현식도 섬을 지배하는 그녀 앞에서 이내 칭얼대고 결국 뒷걸음질친다. 한치의 오차나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욕망의 관자놀이를 겨누는 그녀 앞에서 그들은 무력하다. 찌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먹이를 쳐올리는 그녀의 민첩함은 위협적이다. 푸른 바다 흰 포말 위에서 태어나지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키프로스 섬에서 노닐지도 않지만, 희진 아니 서정(28)은 본능적인 직관과 대담한 의지로 <섬>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깊게 팬 관능적인 여신의 가슴선 뒤로 기다란 삶의 상처를 달고 다니는 희진 역을 맡아 연기한 서정은 잘 알려진 배우는 아니다. 그래서 ‘운좋게’ 거리에서 픽업된 풋내기 신인이라 넘겨 짚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의 독립영화쪽 이력은 임창재 감독의 <눈물> <아쿠아레퀴엠>, 이지상 감독의 <탈순정지대> <둘 하나 섹스>를 비롯해서 만만치 않다. <박하사탕>에선 가구점 사장 김영호의 정부 미스 리 역을 맡기도 했다. 단 한번의 비명을 제외하곤 대사가 없는 <섬>의 희진을 연기하기에 벅차지 않았느냐고 묻자 “전 그냥 섬에서 살다온 거지, 연기하고 왔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한다. 다만 ‘진공 상태’의 섬에 던져져 희진으로 살아가려고 일부러 입을 봉하느라 자신을 쌀쌀맞은 사람이라 여겼을 스탭들에게 미안하다.

<섬> 촬영을 마치고 나니 허리가 19인치로 줄었다는 서정에게 쉬운 장면은 없었다. “자해하는 장면은 4일 동안 나누어 찍었어요. 해가 일찍 지는 곳이라 오늘은 피흘리는 장면 찍고 다음날엔 기어 나오는 장면 찍고 그런 식이었죠.” 고통스러운 느낌이 중간에 끊기지 않을까 걱정돼서 촬영이 끝나고도 숙소로 가지 않고 감독 몰래 세트에서 밤을 꼬박 새운 적이 여러 번이다. 물에 잠긴 배 위에서 나신으로 둥둥 떠 있어야 했던 엔딩장면을 찍고선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다. “그때가 11월19일이니, 물은 발도 못 담글 정도로 찼고 서리까지 내린 날이었어요. 물 속에 누워서 울고 그러다 나중엔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더라구요.” 시나리오의 느낌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섬세한 느낌들이 기술적인 과정에서 축약된 게 못내 아쉽다. 앞으론 “화사하고 따뜻한”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지만 섣불리 도전할 용기가 없어 미루어 놓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인생의 친척>에 나오는 마리에처럼 “고통을 살아내고, 죽음에 대면해서도 승리를 예감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서정, “사유하는 배우”가 자신의 마지막 종착섬(?)이라 했다.

희진 시나리오 처음 읽었을 때 희진에게서 외로움, 야생성, 집착, 뿌리 깊은 고통 같은 이미지가 맨 먼저 떠올랐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본능적인 감성이 앞서는 여자다. 배우가 갖고 있는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단순히 대입해선 관객의 가슴을 할퀴지는 못할 것 같았고 그게 무척 두려웠다. 처음엔 몰랐는데 고삼 저수지에서 두달 묵다 보니 숙소 가는 길에 실제 낚시하러 온 사람들이 쳐다보면 뭐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그들의 시선을 스스럼없이 응시할 수 있는 바로 그 상태, 그 힘으로 끝까지 가면 되겠다 싶었다.

<섬>을 떠나온 지금 아픈 상처도 쉽게 잘 잊는 편이고 집착하고도 거리가 멀다. 그런데 촬영을 끝내고 나선 무섭게 변했다. 전보다 사납고 예민해졌다. 지금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또다른 인물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치유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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