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소비노(33)는 금발의 백치미인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배우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도 그랬지만 <노마진 앤 마릴린>에서도 ‘백치미인’ 마릴린 먼로가 그에게 딱이었다. 국내에 지각 개봉한 이 영화에서 그는 마릴린 먼로 특유의 걸음걸이와 어투, 헤픈 미소를 고스란히 재현했으며 텅 빈 얼굴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파이크 리의 <썸머 오브 샘>의 다이아나 또한, 백치는 아니지만 남편의 외도를 쉽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숙하고 미련한 여자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의 백치미도 일품이었다. 삐딱거리는 걸음새하며 높은 톤의 목소리와 억양, 번잡스런 옷차림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창녀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건 미라 소비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일 뿐이다. 미라 소비노는 대단한 노력과 정교한 연기로 백치의 이미지를 뽑어냈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 날아가는 듯한 어투를 얻기 위해 그는 시나리오만 27번을 읽었다. 그랬더니 캐릭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들은 대로 따라하면 됐다고.
미라 소비노는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며 위트가 넘치는 배우다. 물론, 하버드대 졸업생이라는 꼬리표가 그 징표물은 아니다. 그의 총명함은 기자들의 고리타분하고 관습적인 질문을 받아넘기는 ‘현답’에서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또 백치 같은 캐릭터를 맡을 생각인가요.
=아세요? 코미디를 제대로 연기하는 게 사극보다 훨씬 더 어려워요.
-‘하버드대를 나온 배우’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래도 ‘폴 소비노의 딸’이라는 것보다는 나아요. 그건 내가 해낸 거고 내가 이룬 거니까요.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죠.
=우린 누구도 그렇게 똑똑하지도, 그렇게 어리섞지도 않아요. 오늘 어리석은 짓을 하고서 내일 사과편지를 쓰잖아요.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요.
-대학 동창들이 영화에 출연한 걸 보고 놀라지 않았나요.
=당신이 배우로 성공한 걸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당신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걸요.
-아이비 리그 출신인데, 섹스 심벌로 그려질 때 무슨 생각이 드나요.
=나에게 양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심각하고 학구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릴린 먼로가 되고 싶어하는 거죠.
어린 딸이 쉽게 명멸하는 아역배우가 되길 바라지 않았던 아버지 폴 소비노의 바람 탓에 미라 소비노는 영화에 눈돌리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애정을 타고 났는지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배우가 돼볼 요량으로 여기저기 기웃댔고, 로버트 드 니로의 영화사도 다녔다. 그의 인생을 바꾼 건 저예산 독립영화 <친구들 사이에서>. 처음엔 캐스팅 디렉터로 참여한 건데 어쩌다 주인공까지 맡았고, 영화가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는 바람에 어쩌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눈에 띄였다. 레드퍼드가 감독한 <퀴즈쇼>(1994년)는 그의 주류영화 진출작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출연한 <마이티 아프로디테>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이어지는 그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독립영화와 할리우드영화를 넘나들고 한국감독의 영화(<투 타이어트 투 다이>)에 출연했으며 홍콩배우 주윤발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리플레이스먼트 킬러>). 괴물과 정면대결하기도 하고(<미믹>), 무겁게 가라앉아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도 한다(<다리 위의 룰루> <사랑이 머무는 풍경>). 그러면서 그는 ‘영화의 나이테’를 한뼘씩 늘려가고 있다. 올해 그는 위대한 미국문학으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와 로날드 맥스웰이 연출하는 또 한편의 잔다르크 영화 <잔다르크: 처녀 전사>에 출연한다. 창녀에서 성녀까지, 그가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삶을 살아보면서 미라 소비노는 참된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