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8일 어버이날 방문한 파주 아트서비스의 <가발> 세트장. 공포영화 현장이라면 기본 반찬으로 상 위에 오를 강렬한 조명과 화려한 인테리어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메인조명은 배경을 어루만지듯 희미한 톤으로만 깔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만들어내는 조명도 되도록 사절이다. 배우의 얼굴 윤곽과 암부를 잡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전형적인 장르 공포물을 만들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신연 감독의 출사표는 촬영 세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가발>은 “귀신을 기다리는 영화가 아니라 사람을 지켜보는” 인물의 변화에 집중하는 공포물이다. 따라서 컷의 과도한 분할이나 카메라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전체 800여컷으로 이루어지는 <가발>은 느린 호흡을 통해 세심한 시선을 보여주는 화면 스타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세월의 흔적은 남기고, 인공성은 배제한 세트
흰색과 갈색이 주를 이루는 실내 거실. 목조로 이루어진 거실과 계단은 오래된 가옥의 느낌을 더해준다. 기둥과 대들보마다 그려진 격자 문양도 시간이 묻어나는 인상이다. 재질도 유리와 나무, 흰색의 천들로 단순화된다. 수현과 지현 자매가 살아가는 이곳은 극중 그들의 부모가 남겨준 유산이다. “깨끗한 맨션이나 아파트 같은 곳에 두 자매가 살고 있다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원 감독의 전언. 한국 공포영화에서 트레이드 마크처럼 사용되던 화려한 벽지도 소박하고 때묻은 오래된 벽지로 치환된다. 장춘섭 미술감독은 “감독은 유독 세월의 흔적이 묻은 세트를 좋아한다. 장식적인 세트보다는 질감적인 세트”라고 설명했다. 이는 장르적으로 통용되는 비주얼을 위한 비주얼보다는 드라마와 정서에 무게중심을 두는 원 감독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그러한 손때 묻은 밥상머리에 앉아 가발을 쓴 수현(채민서)은 지현(유선)의 남자친구 기석(문수)을 유혹한다. 쳐다보는 언니 지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한부 인생인 동생 수현이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지자, 지현은 가발을 선물한다. 가발을 쓴 수현은 병세가 급속도로 회복되지만, 동시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의문의 사건들이 펼쳐진다. 지현이 수현에게 선물했던 가발은 죽은 자의 원혼이 담겨 있다. 이처럼 <가발>은 어떤 ‘만들어진 것’을 인물들의 기억이나 심리 변화의 도구로 삼는 대목이 많다. 지난 5월8일 저녁 촬영에서 지현의 과거로 플래시백하는 관문으로 사용되는 유리공예물은 <가발>의 내러티브에서 매우 복합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말을 하지 못하는 지현의 사연, 지현의 남자친구인 기석과의 애정 관계에 대한 은유, 유리부조의 주인공이었던 인물의 사연이 중층적으로 맞물려 <가발>의 최종 결말을 위한 복선으로 깔린다. 유리공예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지현처럼 남자친구 기석의 직업이 화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미술품의 창조자인 지현이 자신의 손으로 유리부조를 박살내는 것은 감정의 폭발과 함께 배후에 잠재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이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달려드는 순간이 될 것이다.
전체적인 색감이나 톤이 “가발의 머리카락 색”이길 원했던 원 감독은 미술 내에서도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유리공예를 택했다. 원래는 회화였다가 설정이 바뀌었고, 두번을 제조했던 유리부조의 얼굴은 감독이 참고했던 클림트와 뭉크의 그림 속 도상들을 닮았다. “클림트의 벽화 이미지와 현실과 추상이 겹쳐지는 뭉크의 특성”을 고려한 부조는 차갑고 날카로운 ‘가발’의 시각성과 조화를 이룬다. 모니터 앞에서는 거실의 유리부조에 갤러리 등을 달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감독, 미술감독, 조명감독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화랑으로 플래시백되는 연결에 자연스러움을 고려하면 갤러리 등을 다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원 감독은 “평범한 가정집 거실에 갤러리 등이 있다는 것은 작위적”이라고 지적했다. 프레임 안에 들어왔던 갤러리 등은 사라진다. 논의 끝에 검은 천을 덧대어 부조의 날카로움을 강조하기로 결정하고 촬영은 계속된다. <가발>의 촬영 컨셉은 이러한 인공적인 설정의 배제를 기반으로 이제까지 이루어졌다고 한다.
“100마리 귀신보다 한명 인간이 더 무섭다”
이틀이 지나 다시 찾아간 세트에서는 망치소리가 요란했다. 카메라가 진입할 방향만 남기고는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다락방 세트가 한창 마무리 중이다. 거북선처럼 각목들과 판자의 외형만 보여질 뿐 속사정은 알 수 없다. 장춘섭 미술감독은 “자잘한 세트가 많다. 준비기간이 그렇게 충분한 편은 아니어서 한쪽에서는 촬영하고, 한쪽에서는 세트를 짓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옆 세트장에도 <가발>의 다른 세트가 준비되는 광경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세트 이동이 많기 때문에 첫 테이크에서 조명 세팅이나 촬영 동선을 고려하는 데 시간이 꽤 소요된다. 원 감독의 전작 <빵과 우유>에서 산간 철도노동자의 새옹지마를 그려냈던 김동은 촬영감독은 “대체로 장소가 협소해서 빛을 처리하거나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며 촬영자의 고민을 전했다. 계단 위를 올라서서 카메라 옆을 향한다. 촬영팀, 붐맨, 스틸기사, 마이크를 든 연출부만으로도 공간이 빼곡하게 채워져 건너편 배우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다.
다락방은 수현의 공간이다. 머리부터 서서히 올라서는 수현의 얼굴과 몸체. 메인조명으로 HMI가 아닌 키노플로(형광등) 라이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어슴프레한 형체만 보인다. 수현이 올라서는 계단을 기점으로 로키 조명을 설치하여 인물의 윤곽을 보완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갑자기 귀신이 튀어나오는 설정이 아니라, 어둠에서 끊임없이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쎄븐>과 <에이리언3>에서 본 일명 ‘데이비드 핀처’의 룩에 가깝다. 수현은 종이박스 속에서 예전 그림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유리부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기억의 산물이며 비극으로 향하는 기폭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저녁 촬영에서 똑같이 다락방을 찾아들지만 지현은 휴대폰의 액정을 비추며 두려움에 몸을 떤다. 이는 시간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공간이 인물에 따라 다른 존재로 다가선다는 의미가 강하다. “100마리의 귀신보다 인간 한명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원 감독의 생각은 두 인물의 대조적인 공간에 대한 반응으로 표현된다. 두 자매의 다락방 장면 사이에 진행된 계단장면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카메라를 어떻게 올렸나 싶을 정도로 좁은 세트의 외형이 보이고, 다락방과 동일하게 출구라는 개념이 없는 세트. 메인 세트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계단은 연기하는 지현만 겨우 올라설 정도로 협소하다. 비주얼보다는 드라마나 캐릭터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결정되는 <가발> 세트의 특성을 볼 수 있다.
침묵과 관찰 통해 배어나오는 공포
<가발>의 가발이 만들어내는 공포는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 의해 변화한다. 가발을 벗어 옷걸이에 걸자, 걸린 옷과 함께 기묘한 분위기를 발생시키는 컷에 그 가발이 툭 떨어지면서 서늘함을 발생시키는 컷이 이어지는 장면은 장르적 연출보다는 “일상이 낯설게 보이는 순간”을 경험적으로 포착하는 <가발>의 시선을 보여준다. 정교한 드라마를 통해 마지막 반전을 화약고로 삼는 <가발>은 배우 유선이 자신이 연기를 평했던 말처럼 “머금고, 보듬는” 공포영화다. 내지르고 외치는 절규보다는 섬뜩한 침묵과 고요한 관찰을 통해 공포는 머리카락처럼 자라난다. 시종일관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감정과 사건의 실마리들을 눌러두다가 맨 마지막에 모든 것을 토해내는 이야기 구조도 이에 한몫 한다. 2004년 고배를 마셨던 공포물들의 공통분모가 장르적인 컨벤션의 과도한 사용과 드라마투르기의 부재였던 점을 감안하면, “공포물보다는 슬픈 멜로에 가깝지만, 어떤 영화보다 무섭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하는 원 감독의 자신감도 일리가 있다. “머리카락은 기억을 먹고 자란다”는 극중 대사처럼 기억과 일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가발>은 6월 초 촬영을 마무리하고 여름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