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평범함의 힘, <강원도의 힘> <섬>의 김유석
2000-04-04
글 : 박은영
사진 : 이혜정

참 평범했다. 하루에 여러 번 길에서 마주치고 스쳐 지나갈 법한,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외모. 첫인상이 그렇다는 얘기를 조심스레 건넸다. 튀지 않는 것은 뭐든 평가절하당하는 개성시대니 만큼, 불쾌하게 해석될 여지는 충분했다. “그렇죠.” 김유석의 얼굴에 여린 미소가 떴다. “그 평범함 속에 에너지가 있어요.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려고요. 한석규 선배나 설경구씨, 다 그런 배우들 아닌가요.” 그는 이제껏 그 평범함 속에 묻어둔 비범한 에너지를 발휘할 기회를 꼭 두번 만났다. 나른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날아든 여대생에게서 욕망의 출구를 찾으려던 <강원도의 힘>의 앳된 경찰이었다가, <섬>에선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고 도망쳐 들어온 저수지에서 또다른 여자를 만나 치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보니,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가련한 인간상,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본질을 담아낸 연기에, 그가 말하는 평범함의 미덕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유학파 배우’라고도 부른다. “서부 개척시대에 깃발 꽂아 땅 따먹듯, 먼저 배우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에, 동국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슈킨 국립연극대학으로 편입해 MFA를 받았고, 국제공인연기지도자 자격증이라는 것도 따왔다. 2년째 숭실대 사회교육원과 극단 미추의 연기학교에서 그간의 경험을 나눠주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 갈고 닦을 수 있으니,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커가는 셈이라고. 그래도 그는 평생 할 일은 연기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없어진 수유리의 천지극장에서 온갖 영화를 섭렵하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고등학교 시절, 재수생을 사칭해 극단을 찾아간 것이 연기와 맺은 첫 인연.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을 갔다왔고, 그것도 모자라 박신양 등의 과동기와 함께 “이론이 현실이 된다는” 러시아로 날아갔다. 유학 시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매료돼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 합류를 별러 왔는데, 배우 오디션에서 “이미지가 맞고, 생각에 힘이 있다”고 합격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작품까진 2년을 기다렸다. 신인으로서 좋은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박하사탕>의 영호 역을 두고 설경구와 마지막까지 겨룬 ‘사건’도 있었다. 김기덕 감독과 영화 <섬>을 만나면서, MBC 베스트극장 <하마>로 TV 나들이도 했다. “메시지가 또렷하고, 날 흥분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면, 앞으로도 매체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 생각이라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쯤, 연극무대에 설 계획도 갖고 있다.

강원도의 힘/ 누가 날보고 강릉 현지에서 캐스팅한 현직 경찰인줄 알았다고 그랬다. 다행이라고 느꼈다. 같이 연기한 배우들이 모두 아마추어고, 홍상수 감독님도 배우의 자아를 비워낸 연기를 지향했기 때문에, 혼자서 연기톤이 튈까봐 걱정했다. 강원도의 나른한 풍경 속에 일상을 묻고 있지만, 내면에 에너지가 끓고 있는 인물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었다. 평단에 남을 만한 작품, 그리고 비중있는 역할로 데뷔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행운이다. 그만큼 남들보다 빠른 출발이었으니까.

섬/ 인간에 대한,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아름답고 추하고, 따뜻하고 차갑고, 슬프고 저열한, 인간 감정의 모든 질감이 있다. 내가 연기한 현수는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없는 현대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살인이나 자해, 극악적인 행위처럼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세상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촬영지인 고삼 저수지에서 원초적인 에너지와 마력을 접하고, 물에 적응해가면서, 여유가 생겼다. 연기하기 특별히 어려운 대목도 없었던 것 같다. 충무로에 또 하나의 다양성을 보태는 영화인 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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