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최근 한국영화들에 나타난 남성상
2000-03-28
글 : 심영섭 (평론가)
우리들의 찌그러진 영웅들

일전에 모 대학 교양국어 교과서에 ‘디즈니 만화의 여성상 분석’과 ‘멜로 영화 비판’에 대한 글을 실어도 좋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내 글이 무슨 신경숙의 <풍금이 있는 자리>도 아니고, 굳이 교과서에 영화 글을 실을 때야, ‘아버지의 업보를 탈피하라’ 라든가 ‘끔찍이 잘해주는 남자를 찾는 것이 못되게 구는 남자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여성을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만들어간다’하는 소리들이 뭔가 이야기거리가 되긴 되었나보다. 그래서 드는 생각.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영화 평론가라는 업을 가지고 카산드라의 머리카락을 뻗치고 살면서도 이 땅의 남성을 향해 얼굴을 돌린 적이 없구나. 남자들도 땅 좁고 사람 바글바글대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왜 아직까지 관심이 없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요즘 한국영화의 기류 속에 남성 주인공들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한때 멜로 영화의 홍수 속에 ‘한석규, 박신양’으로 대표되는 ‘잘해주는 남자’가 여성관객의 영원한 오빠로 최루탄을 뿌리더니, 지난해 <유령>을 끝으로 ‘최민수, 신현준, 장동건’ 등을 간판으로 하는 잘난 남자들도 빳빳한 어깨를 내리고, 한국의 남자들이 빵집주인이나 죽어가는 형사 등의 낮은 자리로 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성의 영웅도 남성의 영웅도 사라진 스크린. 바야흐로 1999년 말과 2000년의 한국 극장가를 보면 ‘깽깽거리는 개소리에도 몸을 떠는 비실이, 나 돌아간다며 기차에 몸 던지는 못난 놈, 밤에만 야수가 되는 소심한 은행원’ 등, ‘밀려난 남자’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서 잔뜩 주눅든 이들 소외된 남자들의 외침을 듣노라면, 한국 남성들의 개인적 환부와 사회적 환부가 동시에 보이는 것도 같다. IMF 이후 고개숙인 남성상의 반영?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관객이 이들에게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닐까?

80년대 집단 속의 개인, 90년대 범죄 폭력

<세기말>

코미디, 멜로, 에로물, 블록버스터 등 몇 갈래로 나뉘어지는 한국영화들 틈에 아웃사이더(혹은 소외자)들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현목 감독의 걸작 <오발탄>을 필두로 80년대 초만 해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 이원세 감독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의 비판적 저항의식을 담은 영화가 짧은 봄을 맞이하기도 했다. 또한 ‘정우성, 박중훈’ 등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90년 한국영화, 일명 깡패 영화라고 불리는 일군의 영화들은 무너져가는 남성성의 상실에 대한 저항과 경직된 사회체제에서의 적극적인 일탈을 꿈꾸지 않았는가. 그것은 철가방을 든 안성기가 구멍난 양말을 다른 발가락으로 감추는, 문제아 정우성이 각목을 들고 교무실을 부술 때 느껴지는 연민과 통쾌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과 2000년의 아웃사이더들을 사회적 소외라는 단어로 한묶음 한다면 너무 거친 일반화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일단 80년대 일군의 영화들은 ‘아웃사이더 2000’들과 달리 엄밀히 말하면 소외당한 ‘계층’ 혹은 ‘집단’을 다루고 있다. <바보선언> 같은 블랙코미디는 예외로 치더라도, 박광수의 사회파 영화들로 나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 영화들은, 집단적 불행에 한숨짓는 ‘정서적 찬동에 머무는 동정론’이란 미적지근한 엉거주춤에 발을 걸고 있었다.

이에 비해 90년대의 아웃사이더 영화들은 더 개별적으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조직폭력에 몸담은 ‘남성’을 그려낸다. 동시에 그들의 몸짓 또한 격렬하고 적극적이고 개인적이다. 가족의 안위든 개인적인 야망이든 가진 것 배운 것 없는 이들 남자주인공들은 번듯이 출세하겠다는 물신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이들의 범죄와 폭력 즉 사회적 일탈은 그 욕망의 구심점에 해당되는 구체화한 행위이다. 따라서 이들 남자주인공들은 그 대가로 결국에는 살해하고 살해당한다. 때론 리얼리즘적 터치로 때론 남성 판타지를 구현하는 폭력으로 혼란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은, <깡패수업>을 통해 <게임의 법칙>을 힘겹게 깨달은 90년대의 <넘버.3>인 셈이다. 따라서 이들이 체험하는 종말과 허무는 자본주의의 모순이며, 이들이 기댄 폭력성은 이들이 가진 거의 유일한 자구책처럼 합리화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주유소 습격사건> <세기말> <박하사탕>을 만든 김상진, 송능한, 이창동 감독은 과거 <깡패수업> <넘버.3> <초록물고기>로 각기 조직 폭력배에 몸담은 남자주인공을 그린 깡패 영화 데뷔작을 가진 공통점이 있다는 것. 이들이 그려내는 남자주인공들의 변신이 2000년대 한국 남자주인공들에 관한 통찰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한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세기말>과 <박하사탕> - 사회가 버린 그들

<박하사탕>

<넘버.3>와 <초록물고기>라는 깡패 영화로 각기 90년 말 한국영화에 이정표를 새긴 송능한과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의 명암은 대조적이다. 여기서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자. <박하사탕>의 거꾸로가는 기차처럼 <박하사탕>의 이야기 구조를 한번 역전시켜보자는 것. 그러니까 현재 물질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흠없이 성공한 한 저명인사의 지난 20년을 조금씩 조금씩 후퇴시키는 것이다. 20년 뒤 당도한 그곳에는 불량품 알사탕 같은 초라하고 비열한 청년이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풀밭 위에 누워 있다. 자 이 청년의 또다른 현재 모습이 바로 세기말의 천민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천’이 아니든가? 그러나 세기말에는 <박하사탕>에 ‘있는’ 점이 안 보인다. 흔히 문장력 약한 운동권 학생의 대자보에서 보여지는 피끓는 비판과 개연성 없는 희망의 제시 외에, ‘현재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그 과정에 천착하는 통찰력, 무엇보다도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절절한 애정’이 말이다. 50년대에 태어난 70년대 학번인 두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와 <반칙왕>에서 엿보이는 후배 감독들의 개인적 성향과 달리, 좀더 낭만성을 배제한 실패자들을 내세워 사회비판을 전면화한다. 그리고 이들의 남자주인공들은 단지 폭력을 구현하고 폭력자체의 모순에 의해 피해자가 되기보다, 좀더 복잡한 사회의 단면을 체화하는 인물들이다.

<박하사탕>의 설경구의 실패에는 <비트>의 정우성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지녔던 ‘낭만적 이상적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사회에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가 만들어낸 기성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치다 자폭하는 인물이다. 사회가 그를 버린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세기말에서 만화방을 하게된 시나리오작가 김갑수의 처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두 감독은 역사적 벽화 혹은 사회적 풍속도를 그리려는 가운데, ‘질곡의 근대사’ 혹은 ‘돈 권하는 사회’라는 수레바퀴에 눌려 삶을 마모시키는 이 땅의 남성을 형상화한다. 따라서 이들 영화들은 이전의 사회 비판 영화가 보여준 단순 논리 즉 악한 부자와 선한 빈자의 이분법적 논리나 단지 폭력의 법칙으로 점철된 정글화된 사회에서 벗어나, 복잡한 인간군상이 엇갈리는 민중적인 사회의식쪽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박하사탕>의 경우는 이를 시간적인 분절로, 세기말의 경우 이야기의 분절로 보여주려하는 차이와 두 영화 모두 구체적 인물들이 숨쉬는 입체적 사회비판이라는 측면에서의 한계와 성취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지만.

<플란다스의 개> <반칙왕> - 판타지 속의 소시민

<플란다스의 개>

이러한 측면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반칙왕>은 더 허허실실이다. 이들 남자주인공들은 사회시스템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조직사회의 승자에 끼일 수 없는 별볼일 없는 남자들이다. 이들은 소시민적이고 남성적인 임무를 부여받지 못한 채, 여성들과 비슷하게 일상을 치뤄낸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한다. <반칙왕>의 은행원 송강호는 자신에게 헤드록을 거는 엄청난 반칙 대가인 은행 과장 앞에서 백드롭을 하기는커녕 늘 발에 힘이 빠져버린다. 간지럼(아부의 상징?)을 통해 헤드록을 빠져나가지만 정공법의 승부는 어림도 없다. 비리에 연루되자 과감하게 은행을 그만둔 동료와 달리 그는 비리에 끼일 만큼 중요한 사람조차 아니다. 그의 가장 은밀한 일탈이라면 남들 몰래 은행이 파한 뒤 레슬러가 되는 것인데 이러한 행위조차 주변사람들에게 변변한 인정이나 지지를 얻지 못한다(그가 진지하게 ‘나 레슬러야’ 했을 때 친구의 반응을 보라).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 역시 대학강사지만 실직자 신세이다. 그는 임신한 아내에게 얹혀 지내며 아내에게 호두를 까주는 신경질적인 호두까기처럼 보인다. 아내와 하는 내기가 고작 휴지로 가게까지의 거리를 재는 이 지식 노동자의 일탈은 이웃집 개를 납치하는 행동.

<플란다스의 개>와 <반칙왕>의 남자주인공들은 기존 남성사회 체계의 자기 부정을 통해, 가부장의 권위 자체가 주는 환상을 평가절하함으로써, 한국영화에 자기 반영적인 색채를 불어넣는다. 예를 들면 <반칙왕>과 <플란다스의 개>에는 각기 의미심장한 판타지가 등장한다. 전자는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는를 부르는 송강호의 꿈 장면이고, 후자는 배두나가 강아지를 구출하고자 결심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똑같은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옥상에서 꽃가루를 뿌리며 격려하는 장면이다. 이는 여성의 영웅이던 남성의 영웅이던 환영주의에 기댄 한국영화에 대한 두 감독의 ‘논평’ 인 셈인데, 특히 <반칙왕>의 환상은 기존의 폭력적인 남성 영웅주의에 대한 풍자적인 상호 텍스트에 복고풍을 가미한 재치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게다가 <플란다스의 개>의 남자주인공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개를 먹고, 납치하고, 옥상에서 던진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이들은 ‘인간의 친구’로서 낯 간지러운 개의 기호학적 이미지에 교묘하게 저항한다.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같지만, ‘플란다스의 개’는 개소리가 아니다.

2000년대 남성, 개인의 시대에서 다양성의 시대로

<반칙왕>

한국영화의 근대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쯤의 한국영화의 변화하는 남성상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겠다. 물론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돌아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이들은 이전의 한국영화가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남성성 상실에 대한 저항과 그것의 회복하려는 욕망을 체념한 듯 보인다. 그러나 또한 이들은 한낱 깡패 영웅담이 빚어내는 환영주의와 사회적 일탈자인 깡패의 죽음으로 기존의 체제를 승인하는 태도 혹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메시지처럼 ‘개판치는 놈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식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손쉬운 타협도 거부한다. 이는 소외계층의 한에 대한 정서적 동참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집단의 시대에서(<가슴에 돋는 슬픔을 칼로 자르고> 이후 단종돼버릴 가능성) 굴절된 깡패의 영웅담인 개인의 시대로(더 양산되겠지만 폭력에 대한 태도가 바뀔 가능성), 그리고 그 개인의 시대가 다양성의 시대로 개인들도 하나의 문화적 개체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부장의 특권에 젖은 남성들은 무력감에 젖겠지만, 사회적 억압이나 공동의 부채의식은 적어지는 사회 말이다. 근자의 영화들은 이 중간에 끼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의 80년대가 정치적 격변의 시기였고, 90년대가 경제적 격변의 시기였다면 2000년대는 문화적 격변의 시기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의 전망? 소재와 타입이 다양해지고 남자주인공들이 더 분화된다면 저열한 안티 히어로가 득세하는 시기가 올 수 있을 것 같다. 록 허드슨 대신 더스틴 호프먼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뜨고 ‘뭔가 다른 남자 조연’들이 주연으로 속속 올라서는 시대. 혹은 최초로 주류에서도 게이 영화가 선보이는 시대 (<내일로 흐르는 강>보다 더욱 자연화된). 디테일이 치밀하고 내밀한 남성의 심리묘사가 가능한 시대 (허진호와 봉준호 정지우 등에 의해 이미 진행형중인) 영화찍기 자체가 소재가 되는 온전한 자기 반영성을 담은 영화의 시대. 이때 선행해야 할 것은 다양한 남성 연기자층의 확보와 이를 구현하는 감독 자신의 미학적 표현적 스타일이 있느냐 하는 것이 흥행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반칙왕>의 흥행성공이 미리 딴 샴페인이 아니라 일종의 축포로 작용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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