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사이트 비주얼, 강종익 [1] - CG 10년의 역사
2005-06-21
글 : 이영진
사진 : 정진환
한국영화 CG의 대표주자 인사이트 비주얼의 강종익 스토리

나의 아름다운 디지털 필름 스튜디오

“Be The Real.” 인사이트 비주얼의 모토다. 이들은 가짜를 진짜처럼, 이미지를 실제처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펼쳐놓은 블루 스크린이 마술융단이고, 똑딱이는 마우스가 요술지팡이였던 건 아니다. 한국영화 CG에 투신한 지 10년. 인사이트 비주얼 강종익 대표는 한국영화 CG 역사와 함께한 인물이다. 그가 애써 이룬 고통스런 진화의 과정은 한국영화 CG의 한계를 확인하는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가 어떻게 지난 10년을 한국영화 CG에 쏟아부었는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더했는지 그의 말을 들었다. 여기에 하반기 최대 기대작인 윤종찬 감독의 <청연>과 곽경택 감독의 <태풍>의 CG 작업에 관한 덧말을 붙였다.


<청연>의 복엽기 테스트 자료들

2003년 초. 윤종찬 감독은 <청연>의 CG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800컷 이상이 CG가 필요한데다 10억원 이상의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라 스케줄 맞는 곳과 무작정 진행할 순 없었다. 신중을 기할수록 좋았다. “CG 작업을 경험해본 적 없는” 윤 감독은 여기저기 업체들을 수소문했지만 그렇게는 옥석을 가릴 수 없었다. 누구는 A업체를 이야기했고, 또 다른 누구는 B업체를 이야기했고, 해당 업체들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주워들은 터라, 결국 누구 말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청연>을 책임질 CG 조종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윤 감독은 급기야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5개 업체가 응했다. “포트폴리오를 보면 되는 걸 뭘 그러느냐고 불평하는 곳도 있다”고 전해들었지만, 윤 감독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인사이트 비주얼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다들 지금까지 작업한 결과물에 대해서만 소개한 데 반해 인사이트 비주얼은 전해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몇 장면을 가상 3D 이미지로까지 준비해왔다.” <청연>의 실패를 쥔 윤 감독의 의중이 적극적인 의사를 밝힌 인사이트 비주얼에 쏠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정도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끈질기게 달라붙어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줄 것 같았다.”

인사이트 비주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 인사이트 비주얼의 이름을 내걸고 작업한 서른네편의 영화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해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한국영화 CG의 수준이 좀처럼 흠잡을 수 없는 수준에 올랐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구한 수십년 전 흐릿한 사진으로만 본 1950년대 평양 시가지를 재현했고, 상상조차 힘든 1·4 후퇴의 장면들을 그려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비주얼에 놀란 건 비단 관객만이 아니었다.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10만 중공군의 진격장면을 보고 사운드 스탭들은 “저 함성소리를 도대체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IN SIGHT VISUAL’이었다.

내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는 CG 전도사

인사이트 비주얼의 존재를 알린 건 창립작 <퇴마록>(1998)이다. 첫주 관객 수익으로만 순제작비 15억원을 가볍게 회수했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눈 씻고 봐도 구별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CG’를 가미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기에 <퇴마록>은 배짱 좋게 ‘눈에 보이는 CG’를 구사했고, 이는 적중했다. 하늘을 나는 월향검, 모니터를 박차고 나온 게임 파이터 등의 장면은 “국산 CG는 안 된다”는 세간의 비아냥을 잦아들게 했다. 급기야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강종익은 “1년에 CG 쓰는 영화가 전부 합해도 5, 6편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퇴마록>이 나온 뒤에 시나리오가 몰려들더라. 인터뷰를 그때처럼 많이 해본 적이 이후로도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퇴마록>은 한국영화 CG의 재기 선언이기도 했다. 1998년은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충무로에 발을 담갔던 대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저어하며 한발 두발 충무로에서 물러나던 때다. 이 시기에 영화부문 주요 CG 업체였던 신씨네 그라픽스, 비손텍, LIM이 무너졌다. 충무로에 돈이 마르자, ‘CG는 사치’라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갔다. 메이저 투자원이었던 대기업의 투자 위축은 <구미호>(1994), <은행나무 침대>(1996) 등이 서서히 점화한 CG에 대한 관심을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합성기술만큼은 할리우드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전의 성과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순간에, <퇴마록>이 등장해 불씨를 되살린 셈이다.

<퇴마록>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강종익은 그러나 1998년 봄, “딱히 갈 곳 없는” 백수였다. LIM에서 영화쪽 CG를 맡았던 그는 회사가 부도처리되자 원치 않은 ‘방콕’ 신세가 됐다. “집에 있는데 TV를 켜면 거리에서 신문지 한장 깔아놓고 노숙하는 분들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새로 영화를 한다는 곳은 없고.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LIM 시절,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꽃잎> <축제> <비트> <넘버.3> 등 9편. 광고와 영화는 다른 터라 “한편 할 때마다 깨우치는 자세로 임했다”는 그는 2년 동안 충무로를 오가면서 어느 정도의 데이터베이스를 갖췄지만, 직장을 잃었으니 써먹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한국영화 CG 1세대를 자처하던 인력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시기에, 강종익은 어떻게 인사이트 비주얼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광고 일을 다시 할 순 없었다. 그만두고 나온 뒤로 지금까지도 그쪽에 미련을 가져본 적이 없다.” LIM에 앞서 그는 CGI라는 광고 프로덕션에서 120여편의 CF 작업을 했다. 하지만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와 같은 자막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넣을 수 없는 꼭두각시 놀음이 갑갑해졌고,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오퍼레이터로 전락한” 자신이 싫어, 결국 입사 2년째이던 1995년 첫 직장을 때려치웠다. 이후 친구 소개로 들어간 곳이 바로 LIM. “혹시 영화화되면 꼭 CG 작업에 참여해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했던 소설” <퇴마록>을 LIM이 맡게 되자, 그는 “자신이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이번엔 회사가 먼저 주저앉았고, <퇴마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위), <챔피언>

석달 동안 빈둥거리던 그가 “막연하게 기다리다간 안 되겠다 싶었다”며 무작정 <퇴마록>의 제작사인 폴리비전부터 찾았다. 그때 그의 수중엔 장비 하나 없었고, 곁에 동료 하나 없었다. “박광춘 감독님이나 제작사 대표나 당황한 눈치였다. 무조건 맡겨달라고 하는데 제작사쪽에선 믿을 구석이 없었을 테니까. 오죽했으면 대표가 그러다 당신이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고, 나보고 결혼은 했느냐고 묻기까지 하더라.” 그러나 폴리비전의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계약금만 먼저 받고서 일을 시작하겠다는 업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퇴마록>은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강종익의 손에 다시 떨어졌고, 계약금 5천만원을 종잣돈 삼아 인사이트 비주얼이 만들어졌다.

“잃을 것 없는” 궁색한 살림, 그에게는 열정과 의욕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퇴마록>의 경우, 강종익을 비롯한 4명의 CG맨들이 달라붙어 3개월을 꼬박 바친 결과였다. 장비도, 작업실도 없던 터라 그는 부도난 LIM에 혼자 출근하면서 <퇴마록>을 매만져야 했다. “10시만 되면 건물 셔터가 내려갔다. 그때부터 아침까지는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영락없는 감옥이었다. 동료인 손승현 실장이 직접 싸다 준 도시락을 먹으며 100일 가까이 밤샘 작업을 했는데 나중에는 우울증까지 생겼다.” <닥터K> <짱> <텔미썸딩> <세기말> <춘향뎐> <아나키스트> <리베라 메> <불후의 명작> <배니싱 트윈> 등이 <퇴마록> 이후 2년 동안 인사이트 비주얼의 디지털 붓질을 거쳐간 작품들. 자그마한 오피스텔에서 뚝딱거리던 그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먹고 자는 것 빼곤 CG만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CG의 경우, 현장스탭들과의 원활한 소통이 무엇보다 필수. 그러나 그의 역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강종익의 말에 따르면, 블루 스크린용 페인트를 주문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일반 페인트를 섞어서 쓰는 일이 다반사였던 촬영현장이 적지 않았다. 블루 스크린 촬영을 위해선 적정 노출이 이 정도다, 라고 하면 조명팀에선 ‘너나 잘하라’고 쏘아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찍힌 영화들은 곱절의 노동이 필요했다. “페인트를 섞은데다 필터처리를 하지 않고 조명을 하면 색이 탁해진다. 나중에 제 색깔을 만들려다보면 피사체가 뭉개지는데 그거 다시 보정하기 위해선 작업 시간이 3∼4배 더 길어졌다.” 그가 CG 전도사를 자처하며, 촬영현장에서 설명하고, 또 설명하길 멈추지 않았던 이유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그때의 한계점으로 역추적해본 한국영화 CG 10년의 역사

창작자에게 만족이란 없다. 아쉬움은 언제나 남는 법이다. 강종익씨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작업을 끝낸 34편 중 완벽하다고 자찬할 만한 작품은 없다고 말한다. 아래 장면들은 결국 살아남아 지금도 강씨를 괴롭히는 최악의 컷들이다. 화가야 작품이 맘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를 찢어버리면 그만이지만 한 스탭의 입장에서 다른 이들의 수고가 녹아 있는 장면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최악의 결과물이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그로 하여금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십 차례 하게 만들었으니까. 어쩌면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 CG가 이룬 진화를 성취가 아닌 한계로 역추적해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마지막 방위>(1997)

감독 김태규 출연 김민종, 허준호, 박광정

LIM 시절에 작업한 영화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촬영이 모두 끝난 뒤에야 우리쪽에서 맡기로 결정이 났다. 주인공들이 수송기에서 낙하하는 장면에 비행기 뒷배경으로 하늘을 합성하는 작업이었는데 촬영 분량을 보고 기겁했다. 블루 스크린을 대긴 했는데 이 장면을 핸드헬드로 찍었더라. CG 작업을 위해 기준이 되는 마킹(marking) 포인트도 표시하지 않은데다 카메라를 들고 흔들어댔으니. 합성 전에 일일이 수작업으로 인물들의 움직임을 맞추는 데 힘을 쏟았고, 길어봤자 1주일이면 끝날 일을 한달 가까이 작업했다.

<퇴마록>(1998)

감독 박광춘 출연 안성기, 신현준, 추상미

소소한 것도 챙겨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던 영화다. 승희(추상미)의 몸에 빙의가 드는, 갑자기 평범한 여자의 모습에서 마녀처럼 변하는 모습을 교차편집하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촬영 때 미리 의상체크를 하지 못했다는 거다. 당시 추상미가 입고 온 의상은 초록색 스웨터에 파란 불방울 무늬 옷이었다. 명백한 내 실수였다. 그 옷을 입고서 블루 스크린 앞에 섰는데, 나중에 블루 색감을 빼내니 총맞은 사람처럼 추상미의 몸에 구멍이 나더라. 그거 커버하느라 이래저래 고생했다.

<리베라 메>(2000)

감독 양윤호 출연 최민수, 차승원, 유지태

최민수와 김수로가 병실 문을 열면 불길이 타오르는 설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트에 직접 불을 내서 촬영을 해주면 거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해 풍성한 불길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제작비 문제로 양수리 세트 아래 보일러실만 덜렁 찍어서 보냈다. 이런 경우 아무리 CG가 요술방망이라고 해도 안 된다. 멍석이 있어야 재주를 부리지, 그건 시간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실제 작업을 끝내놓고 아무리 봐도 맘에 안 들었고, 나중엔 이런 상황이 되면 싸우더라도 관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후의 명작>(2000)

감독 심광진 출연 박중훈, 송윤아

이 경우엔 결과에 대해서 다 만족을 했는데 관객에게 오해를 샀던 경우다. 박중훈과 송윤아가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감독이 요구한 건 최대한 촌스럽게 해달라는 거였다. 마치 1950, 60년대 영화처럼 백스크린에 거리 풍경을 투사해놓고 그걸 다시 찍는 효과의 느낌이어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지더라. 관객이 저 장면, 이상하다고 했을 때 당황했다. 이후로는 감독들이 이 장면은 투박하게 합성해주세요, 하면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있다고 미리 말하기도 한다.

<클래식>(2003)

감독 곽재용 출연 조승우, 손예진

흉가를 둘러본 두 주인공이 돌아가려 하는데 타고 왔던 쪽배가 둥둥 떠내려가는 장면이었다. 설날에 개봉할 계획이었는데 1월까지 그 장면 촬영이 끝나지 않았다. 결국 찍지 못했고 회의 끝에 다른 컷 분량을 소스 삼아서 작업했는데 맑은 날씨에 두 배우가 노젓고 가는 장면에서 배우를 지우고 노도 없애고 비를 내리게 하고 그랬다. 90년대 중반도 아닌데 이런 억지를 부려야 하나 싶었다. 모든 사물들의 명암이 분명해지는 맑은 날의 느낌 대신 구름을 통과하는 소프트한 빛의 느낌을 입히는 게 어려웠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