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로봇’이 아니라니깐요
1926.<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6)에 등장하는 로봇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마리아의 복제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탄생 초기에는 금속으로 구성된 몸체가 잠시 드러나지만, 곧 마리아와 똑같은 외모를 지니고 붙잡혀 있는 진짜 마리아 대신 노동자들 앞에 나타나 폭력을 부추긴다. 마리아 로봇은 지금 보아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감각의 메카닉 디자인을 지니고 있다. 이 놀라운 시각적 이미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로봇이 영화 속에서 오로지 악역만 담당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듯하다. 어쨌거나 할리우드에서는 1950년대가 되도록 깡통 땜질 수준의 로봇 디자인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메트로폴리스>의 마리아 로봇은 분명 시대를 초월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1956.<금지된 세계>의 로비
셰익스피어 희곡 <폭풍우>(Tempest)를 각색한 <금지된 세계>(Forbidden Planet, 1956년)는 당시로서는 대자본과 최첨단 특수효과, 그리고 전자음악 사운드트랙이 채택된 컬러 대작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낳은 최대의 스타는 다름아닌 로봇 로비였다. 두팔과 두 다리를 지닌 직립보행형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외모와는 거리가 먼 로비는, 어떤 물질이든지 합성해내는 놀라운 재주를 지녀서 어린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에 <투명소년>(The Invisible Boy)이라는 영화에도 다시 출연했다. 로비는 무려 20년 이상 가장 대중적인 로봇 캐릭터로 인기를 누렸으며,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은채 부모와 자녀, 손자 세대를 이어주는 공감대 역할을 하고 있다.
1977.<스타워즈>의 R2-D2와 C-3PO
<스타 워즈>(1977)의 로봇 캐릭터가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R2-D2의 독특함에 있는 것 같다. 일종의 ‘이동형 만능기계’인 이 로봇은 인간보다는 주로 기계나 컴퓨터들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활동한다. 이전까지의 로봇들은 다만 외형이 인간과 흡사하다는 점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기능적인 면이 중시된 R2-D2는 그만큼 과학적 설득력이 충실한 최초의 로봇 캐릭터인 것이다. 물론 깜찍한 디자인과 코믹한 효과음 따위도 인기몰이에 큰 몫을 하긴 했지만. 반면에 전적으로 인간을 보좌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서’ 로봇인 C-3PO는 5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할머니격인 <메트로폴리스>의 로봇 마리아의 디자인을 차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마 인체의 관절구조를 모방한 인간공학적 디자인의 한계일 것이다.
1984.<터미네이터>
<터미네이터1>(1984)의 '터미네이터'가 인기를 얻자 <터미네이터2>(1992)에선 악당의 꼬리표를 떼어버린다. 대신 무정형의 액체금속 로봇이 강력한 맞수로 새롭게 등장하여 만만찮은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터미네이터'가 오늘날 사실상 가장 인기있는 로봇 캐릭터가 된 것은 이처럼 캐릭터 성격의 극적인 전환이라는 연출에도 힘입은 바가 크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노회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1편에서 '터미네이터'는 글자 그대로 ‘끝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무자비한 전투기계였기에 적군에서 우군으로 돌아섰을 때의 드라마틱한 효과도 그만큼 컸다. 터미네이터는 로봇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냉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어쩐지 정신적으로 황폐화해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987.<로보캅>
1987년에 처음 등장한 <로보캅>은 사실 로봇이 아니라 사이보그이다. 인간의 신체 일부를 기계나 인공기관으로 대체했다는 뜻에서. '로보캅'은 비록 전신이 금속 뼈대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통제중추는 사망한 경찰관의 두뇌를 되살린 것이다. 영화에서 '로보캅'이 예전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정체성의 고민에 빠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보캅'은 터미네이터의 연장선상에서 무자비함과 정의의 수호자라는 역할 덕분에 어렵지않게 어린이들의 인기를 이끌어내어 이후로 후속편이 줄줄이 이어지고 만화영화 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1996. <스타 트랙: 그 다음 세대>의 ‘데이터’
<스타 트랙: 그 다음 세대>에서 승무원 중 한명으로 나오는 데이터는 안드로이드이며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다. 그의 전자두뇌는 경이로움과 의문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스스로 ‘진화’가 가능하다. 그는 등장할 때마다 항상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화두에 몰두하면서 인간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이터는 사실상 로봇의 궁극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2000.<바이센테니얼 맨>의 앤드루 마틴
SF문학 독자들에게는 <바이센테니얼 맨>이 단순히 한편의 영화 차원을 넘어서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전설적인 SF작가였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이 장장 60여년 만에 사실상 최초로 스크린에 구현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바이센테니얼 맨>은 아시모프가 남긴 숱한 로봇소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원작의 품격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각디자인 등은 아시모프의 팬들에게 그런 대로 뿌듯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로빈 윌리엄스가 앤드루를 맡은 것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디지털 SFX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아시모프의 로봇들을 스크린에서 접할 기회는 자주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