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그녀’
미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기억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폭행당해 잘린 머리와 야성의 눈빛으로 처음 만난 게리 쿠퍼를 바라보며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녀. 흰 이빨이 드러나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많은 사연을 품고 있던 그녀. 키스할 때 코는 어디다 두어야 하냐고 묻던 그녀.
내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그녀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영화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 몇 번이나 보았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난 똑똑히 기억한다. 그녀의 미소를. 그녀의 눈빛을. 그녀가 꿈꾸던 세상을.
평범한 소년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었고, 그 감독이 동경하는 여성의 캐릭터엔 언제나 마리아 역의 잉그리드 버그만이 내재돼 있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그녀는 전쟁 중에 희생의 위기에서 구출된 스페인 여자였고, 짧은 머리였으며 학살 중에 생존했다. 그녀의 야생적인 순수함은 마땅히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한참 동안, 어떤 식으로든지 희생당하는 여성을 구하려고 내 영화 속에서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 중심에는 아마도 잉그리드 버그만의 ‘마리아’가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폴란드에서 영화 공부를 하던 수년 전 한참 밤샘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였는데도, 나는 텔레비전을 끄지 못한 적이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에 관한 다큐멘터리인데 뭐 시나리오가 대수인가! 잉그리드 버그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웨덴 출신의 배우다. 당대 최고의 감독과 남자배우들과 연기했고 그녀에 관한 아름다움은 세상의 모든 남성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화산같은 심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총명했으며 배우로서 열정은 그녀의 안정적일 수 있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유부녀였으며 열한 살의 딸까지 있었지만 촉망받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를 보고 그 감독과 그의 영화 <무방비 도시>에 매료된다. (나는 별 감동없이 그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 극사실주의 시점에서 전쟁과 전쟁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강렬하고 과장없이 보여 주었던, 당시 할리우드 영화와는 정반대편에 서 있던, 어쩌면 미국사람들의 생각에선 좌파 성향이 강했던 작품이었다. 그녀가 그런 작은 유럽의 영화를 보고 매료당하다니! 그리고 가족을 버리고 바람둥이 유부남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져 모든 부와 영광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작가 감독에게 가다니!
가슴에 불이 붙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타락한 우상’이라며 손가락질했고 그녀가 재기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련과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녀의 유작인 <가을 소나타>라는 잉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다시 자신의 고향인 스웨덴으로 돌아와서 모국어로 연기했다. 그녀는 67살이었고 촬영할 때 암 투병 중이었지만 아무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고 자신의 생과 똑같은 상황의 배역을 맡았다.
<가을 소나타>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명성 때문에 버리다시피 한 딸과의 화해와 용서의 과정에 관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찍고 곧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딸을 버리면서까지 그녀의 열정을 위해, 전세계 사람들과 정반대편에서 그녀의 꿈을 위해 살았다.
그녀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사랑을 위해 살기는 쉽지 않다. 완벽한 여신으로서의 조건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까지 살아 있으며 그녀의 미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