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으로 본 <타인의 취향>
2001-07-19
글 : 심영섭 (평론가)
낯선 것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자유로워져라

“타자는 타자로서 고귀함과 비천함의 차원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영광스런 비천함.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1. 대화 혹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떤 부조리극

타인의 얼굴은 낯설다. 가족이든 동료이든 삶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이를 인파가 북적이는 길가에서 마주쳐본 사람은 알리라. 타인이라는 익명의 섬으로 다가오는 오래된 이들의 얼굴을. 이윽고 ‘익숙한 타인’이 된 그를 어색해하며 외면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안다고 믿었던 모든 정보를 부정하며 다가오는 ‘그들’의 얼굴은, ‘너’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날선 칼날이기도 하다. 내가 진정 저 얼굴을 알았던가? 나 자신이 세상에 그려넣었던 모든 기호와 표상을 무화시키는 저 얼굴을 보라. 친숙한 낯선 이에 대한 외면은 곧, 나 자신의 이 세상에 대한 존재의 부정이 아니던가.

아녜스 자우이의 신작 <타인의 취향>에는 많은 대화들이 나온다. 라신과 입센에 대한 연극 이야기도, 오늘밤 자고 싶은 남자에 관한 취향도, 오래되어 절어버린 강박관념에 가까운 예전의 직업적 실수도 들어가 있다. 입담 좋은 영화는 식탁의 대화에서 시작하여 주인공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합주로 끝난다. <타인의 취향>에는 독백이 없다.

그러나 타인의 취향의 주인공들이 ‘대화’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불완전성을 증거하는 끊임없는 부조리극을 행하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10년 만에 만난 남자 앞에서 태연히 ‘같이 잤어요. 그게 다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바텐더 마니는 30년 동안 300명의 여자와 잔 프랑크에게(이 재미있는 계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취향>은 한번쯤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침대 위에서 자신은 남자친구가 없다고 알려준다. 웁스. 그러나 그 순간 마니 집의 도어벨은 경종을 울리고 마니는 부스스한 차림으로 웬 남자를 맞이하러 나선다. 마니의 ‘남자친구 없음’은 거짓말이었을까? 마리화나 장사를 하는 마니의 처지를 알고 나면 이 한밤중의 남자가 ‘어쩌면 고객’이었다는 확증이 들기도 하지만, 쉴새없이 낯선 이에게서 전화를 받는 마니를 보고 정작 프랑크는 ‘인기좋다’고 질투어린 시선을 보낸다.

결국 <타인의 취향>에서 행해지는 사람과 사람간의 오해와 부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무기력의 경험이며, 자율적 통제가 되지 않는 어떤 메타적인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이름붙일 수도 없고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너도 나도 아닌 상황에 처해 있는 부조리.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각도를 달리해 반사되어 침입하는 타인의 말과 언어. 타인의 존재, 타인의 얼굴은 너와 나의 대화가 부정 교합되는, 일상의 모퉁이가 들이닥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알지 못하는 낯선 암호와도 같다.

2. 지적 속물주의의 폭로

부자 사장 카스텔라와 그의 아내 앙젤리크의 대화는 어찌 보면 보디가드인 프랑크나 운전사인 브루노의 대화보다 더 재미없어 보인다. 앙젤리크와 카스텔라는 주로 TV드라마와 다이어트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때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순진한 동물애호가인 앙젤리크는 타인의 배려조차도 자신의 취향대로 강제한다(그녀는 시누이인 베아트리체의 집들이를 자기 식으로 꾸몄다).

실상 카스텔라의 영어 선생이자 연극 배우인 클라라가 나타났을 때, 카스텔라와 클라라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마찬가지 처지이다. 영어와 불어라는 상징적인 두 언어의 부딪힘이 그러하듯, 카스텔라가 직면한 것은 클라라라는 여자를 사랑해서 당도하게 된 보도 듣도 못하던 많은 지식으로 무장한 예술가집단이다.

<타인의 취향>의 최고 매력포인트는 관객이 카스텔라에게 품었던 생각- 즉 몰리에르나 버나드 쇼의 희극에 등장하는 속물 부르주아 같던 카스텔라의 인상 역시 ‘편견’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 아녜스 자우이는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하나 카스텔라의 매력을 역전시키고, 카스텔라를 비웃고 왕따시키는 지식인집단의 지적 속물주의를 폭로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만큼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역시 주인공들의 배역 때문에 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을 보고 키득키득 웃는 우리네의 웃음이 더이상 여유로울 수만은 없게 됨도 이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취향>의 주인공들은 가면 갈수록 우리처럼 삶의 미세한 균열로 풍치를 앓는다. 많은 여자들과 자본 척하며 연하의 동료인 브루노에게 인생에 대해서 한수 가르쳐주려 하는 보디가드 프랑크는 정작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한 채 전전긍긍한다. 순진한 듯 보이는 부르노는 자신도 딴 여자와 잔 처지에 여자친구가 변심한 것에 상심해한다. 영어 회화조차도 “재미있게 배우는 방법 없나요?”라고 물어보던 실용주의자 카스텔라가 사랑 때문에 콧수염을 밀고, 어줍지 않은 영어 시를 지어 바치자, 이 모습을 본 프랑크는 자신의 사장을 ‘사람은 좋은데 바보’라고 평한다. 그러나 프랑크가 술이나 담배는 합법이고 마리화나는 불법이라며 마약을 파는 마니의 집 앞에서 머뭇거릴 때(그의 마니에 대한 사랑의 또다른 난관 중 하나는 남녀의 역할에 대한 그의 고정관념에서 나온다) 타인의 취향을 접수하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카스텔라쪽이었다.

3. 상처받음으로 타인을 이해하다

카스텔라와 클라라가 계급/지식/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마니와 프랑크 커플보다 훨씬 연애의 경사도가 급격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국 희미하게나마 자신들의 진심을 소통할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왜일까?

자나깨나 카스텔라를 지켜보던 보디가드 프랑크는 그러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결국 강도들의 습격에서 카스텔라를 지켜내지 못한다. 피를 흘리는 카스텔라의 머리를 닦아주며 마니는 카스텔라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입센의 비극 <헤다 가블러>를 공연하는 클라라는 비록 연극 속에서지만 자신의 머리를 쏘는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한다. 반면 카스텔라의 부인 앙젤리크는 흥분한 상태가 되어 운전사 브루노에게 위선과 죄, 그리고 상처를 모르는 동물이 사람보다 더 좋다고 강변하다 망신살이 뻗친다. 앙젤리크의 순진한 이데올로기를 받아 넘기는 브루노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럼 디즈니랜드나 가야죠.”

클라라와 카스텔라는 상처입고 피흘리고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취향과 편견을 넘어선 진정한 사랑의 대열에 살짝 낄 수 있게 된다. 남편을 애완동물 다루듯 “과자 줄까요?”라고 물어보던 앙젤리크마저도 카스텔라가 집을 나가자 처음으로 시누이인 베아트리체에게 그녀의 취향도 좋은 것 같다고 인정해준다.

타인의 얼굴이 어떤 기호로도 그려지지 않는 막막한 이질성이라면, 그리고 그 미세한 현실세계로서의 현현이 바로 취향의 문제라면, 역설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타인의 얼굴에 대한 무저항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영화 <타인의 취향>은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끊임없는 오해와 부조리의 인생 속에서도 진정으로 타인의 취향을 접수하는 힘은 상처받는 힘이라고, 타인의 존재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융통성과 용감함의 미덕에 대해 말해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뭐니뭐니해도 <타인의 취향>에서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내뿜는 것은 자유로운 바텐더, 마니가 아닐까 싶다.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의 상드린 보네어에 버금가는 매력적인 캐릭터 마니는 10년 만에 만난 단 한번 같이 잔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이를 쾌활하게 받아넘긴다. 여자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자지 않는다며 운전사 부르노가 여자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피력해도 마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다. “아무 남자하고나 자는 여자도 있어요.” 사실 바텐더와 마약장수라는 두개의 직업으로 사람들에게 술과 약물을 공급하는 그녀는 뒤집어보면 사람들에게 구체적 위안을 공급하면서도 고무줄 같은 유연성으로 어떤 제도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의 숨결을 타고난 여자이다.

4. 영화 속 연극, 심리묘사를 위한 장치

우스꽝스런 삶의 위선과 사람들의 내밀한 감정의 결을 ‘아이스케키’라며 들춰내는, <타인의 취향>은 에릭 로메르 유의 수다쟁이 프랑스코미디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은 계보를 그린다. 그러나 진정 아녜스 자우이가 <타인의 취향>의 연출에 마음을 두었던 것은 그녀의 뿌리인 연극 무대의 전통을 영화와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몇몇 영화적인 기교, 즉 자동차 프레임이나 혹은 고전 멜로영화에서 보였던 화려한 인테리어에 포위된 카스텔라의 처지를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을 제외하고, 자우이의 카메라는 그 동선을 상당히 자제하는 편이다. 게다가 심지어 실외장면에서도 그녀의 카메라는 하늘이나 지면 같은 여백없이 인물 중심으로 타이트하게 화면을 죄어 나간다. 마치 연극을 구경하는 우리의 눈과 엇비슷한 화면짜기를 보여주는 자우이의 연출은, 화려한 편집과 카메라워크 없이 관객과 상당히 지적이면서도 미묘한 의사소통을 꾀한다. 특히 <타인의 취향>에서는 음악과 대사가 그 어느 장치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오페라 <리골레토>의 2막에 나오는 아리아 ‘caro nome’를 ‘화니타 바나나’로 착각하는 카스텔라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감독의 자상한 손길마저 느껴지는 대목(카스텔라 역의 주인공 장 피에르 바크리는 아녜스 자우이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심증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영화 속에 장시간 등장하는 입센과 라신의 연극일 것이다. 라신과 입센의 비극은 연극사에서 순수비극 혹은 사실주의의 비극의 선두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동시대의 극작가 코르네유가 ‘있어야 할 인간’을 그렸다면 라신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프랑스 연극의 총아로 떠올랐다. 클라라의 내면을 형상화한다는 측면에서뿐 아니라 모두 지독한 비극이라는 점, 인물의 심리적 묘사와 리얼리티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이들 연극은 <타인의 취향>의 대칭거울 같지 않은가? 상처에 대해서 보여주기보다 상처에 대해서 ‘공연’한다는 측면에서 <타인의 취향>은 가볍지만 그리 가볍지 않은 어떤 측면을 지닌 것 같다.

5. 타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라

영화 초반 같은 식당에서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세 남자 카스텔라, 부르노, 프랑크는 이윽고 비슷한 사랑의 치명타를 입고 나란히 술집에 앉아 술집 여자들을 꼬시는 신세가 된다. 상/하 관계나 주인공/타자 관계를 넘어서 <타인의 취향>은 자신의 주제의식에 걸맞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아기자기한 이야기에 골고루 귀를 기울여준다. 그러나 아녜스 자우이는 사람들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변해도 아주 천천히 조금씩 변화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취향>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주제음악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의 강박관념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와중에 미래와 시간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어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타인의 취향>의 마지막은 서툰 솜씨지만 사람들 속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를 합주하는 브루노의 모습. 재미있게도 <타인의 취향>의 첫 대사는 바로 프랑크의 <말도 안돼> 라는 대사였다.

그렇다면 결국 이 취향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불러들이는 부정과 더이상의 가변성을 허락하지 않는 완고한 부정성 사이에서 왔다리갔다리했던 것일까? 레비나스는 타자의 출현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자의 얼굴을 쓰다듬고 여전히 낯선 것으로 놓아주는 것이 결코 자기다움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브루노의 ‘미미미미미미미∼’의 음조로 시작되는 <아니,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가 그토록 흥겹고 아름다워보이는 것은 그가 타인들과 섞이되 또한 섞이지 않는 부분도 있기 때문일 터. 이런 걸 사람들은 카스텔라의 대사대로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인생극장의 마지막 커튼 콜이라고 해야 하나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