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이 오면>은 최민식 주연의 영화 제목이지만 영화는 이 제목의 주인이 아니라 ‘차용인’이다. 영화 포스터 제작회사 ‘꽃피는 봄이오면’(꽃봄)으로부터 빌린 제목이다. 95년 이 이름을 상표 등록한 ‘꽃봄’은 <박하사탕>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집으로> <몽정기> <주먹이 운다> 등 지금까지 50여 편의 주요 한국 영화 포스터를 만들어온 포스터 제작사다.
역동적인 일 하고 싶어 졸업뒤 친구들과 회사 차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손글씨 첫 시도 큰 화제
<박하사탕> <집으로> 등도 주목, 회사창립10돌 기념 전시회도
“영화 포스터 제작이라면 한장의 그림이나 사진만 떠올리지만 사실 시나리오북 제작에서 보도자료, 종이 광고 제작 등 영화의 전체과정에 참여하는 일이죠. 그만큼 많은 시간이 투여돼 힘들기도 하지만 다른 광고 제작보다 훨씬 역동적이기도 해요.” 95년 홍대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직후 “기업체에 들어가면 한 가지일만 해야하는 게 싫어” 대학 동기들과 함께 광고회사 ‘꽃봄’을 차린 김혜진(34) 대표는 이현승 감독의 추천으로 99년 <박하사탕> 포스터 작업을 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됐다. 주인공의 얼굴 대신 부드럽게 잡은 손과 흰 소매를 클로즈업했던 이 포스터는 영화가 처음 공개됐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일으킨 작품. 이 밖에 구닥다리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오래된 초등학교 교과서 표지 형식을 빌어 깜찍하게 변형시킨 <집으로>나 집창촌의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현대적이면서도 은밀한 관음증의 분위기로 뒤바꾼 <나쁜 남자>, 수천 개의 가족사진을 모아 하나의 가족사진을 구성한 <가족> 등이 주목 받았던 ‘꽃봄’의 대표작들. 이 가운데 김 대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
“저예산으로 찍은 영화라 포스터 제작비를 따로 댈 수 없었죠. 그래서 노 개런티로 작업하는 대신 조건을 달았어요. 포스터 내용을 간섭하지 않는다. 그때 처음 시도한게 캘리그래피(기계가 아닌 손으로 쓴 아름다운 글자)예요.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려서 직접 제목을 썼죠.” 당시만 해도 영화 제목은 대문짝만한 컴퓨터 서체로 선명하게 박아넣는 게 불문율이었다. “처음에는 류승완 감독님도 디자인을 탐탁치 않아 했어요. 지나가다 만난 만화가 이우일씨가 포스터 멋지다니까 ‘그게 좋은 거예요?’ 반문했다고 하더라구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는 결과적으로 큰 화제를 뿌렸고 많은 관객들에게 영화 포스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캘리그래피는 이제 절반 이상의 한국 영화 포스터에서 사용되는 기법이 됐다. <집으로>의 장난감같은 자전거나 <신부수업>의 고풍스러운 성경 등 꽃봄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이색적인 소품은 김 대표의 남편인 스타 시에프 박명천 감독의 애장품들이다.
“모든 영화 마케팅이 포스터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많이 부담스럽죠. 흥행이 잘 안되면 우리 탓인 것만 같고.” 꽃봄이 최근 제작하고 있는 작품은 공포영화 <가발>의 포스터.“공포영화라면 으레 등장하는 핏빛이 없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게 김 대표의 계획이다. 또한 ‘꽃봄’은 회사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전시회 ‘오늘, 영화의 꽃 포스터를 봄’을 16일부터 서울 대학로 국민대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연다. “회사로 포스터나 보도자료를 구할 수 없냐는 일반인들의 전화가 자주 와요. 포스터 제작과정이나 아이디어 같은,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를 공유해 보자는 차원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꽃봄’의 전시회에는 지금까지 제작한 영화 포스터 대표작과 미공개 비(B)컷, 포스터 촬영현장 사진, 보도자료, 시나리오북 등이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