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 장르 전문의 미술감독
“영화는 감독의 것이기 때문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감독이 내린다.”. 류성희의 이 말은 백번 옳다. 감독들이 류성희의 제안을 혹은 제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앞서 열거한 부분들은 각 영화의 감독들이 자신의 영화에 대한 류성희의 미학적 ‘관점과 해석’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몇몇 사례라고 할 만하다. 이쯤 돼서 궁금해지는 것. 그렇다면 과연 류성희가 그들의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또는 반대로, 류승완,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그들이 공유하게 된 류성희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그럼으로써 류성희를 고리로 한 그들 사이의 공유점은 무엇인가?
류성희는 이미 그 좌표에 대한 많은 향방을 쥐고 있다. 말 속에 은연중의 대답들도 있다. 먼저 류성희는 “언제나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경계를 고민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꽃섬>이 첫 작품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영화는 자체로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경계’를 어떻게 배열하는가가 중요한 영화였다. 그러나 여기서 류성희가 자신의 첫 영화 <꽃섬>에 대해 “다소 관념적이었다”고 반성적으로 평하는 것에 주목하자. 류성희는 <꽃섬> 이후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만나지만 관념적이지는 않은 방식,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 셈이다. 그 점에 대한 출구로 찾은 것은 바로 ‘장르’다.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만나면서도 관념화되지 않고, 구체적이며 입체적인 방식이 될 수 있는 길로 장르영화를 선택한 셈이다. “일단 장르라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미술적으로 안전하게 내 생각이 허용된다. 장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한계가 있어서 훨씬 디테일하게 들어가기도 편한 것 같다”는 말은 장르영화의 울타리가 그녀 자신의 미학을 어떻게 충족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장르 중에서도 지금까지 류성희와 연을 맺고 있는 장르는 ‘누아르’이다. “누아르죠. 지금까지 제가 한 게 다 누아르인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한 화답처럼 김지운 감독은 미술감독 류성희와 함께 일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놀랐던 점은 <살인의 추억>에서의 지하 취조실, <올드보이>의 감금방이었다. 누아르적 공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뭔가 이미지에서 냄새가 펄펄 나는 것 같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재현이 아니라, 분위기를 가진 리얼한 영화적 공간들이었다.” <올드보이>가 누아르라는 장르를 앞세우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은 자신이 취할 누아르영화의 어떤 점을 본 것이다. 또는 <전원일기>의 공간에 <쎄븐> 같은 스타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살인의 추억>이 농촌 스릴러를 표방하긴 했어도, <쎄븐>이 포스트 누아르 또는 네오 누아르라고 불렸던 점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농촌 누아르’라고 불려도 무방했을 것이다. 누아르를 전면에 표방했던 <피도 눈물도 없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근래에 만들어진 한국영화 중 누아르를 표방하는 혹은 그에 가까운 영화의 비주얼을 거의 류성희가 전담하고 있는 것이다. 류성희는 적어도 지금까지 전문 ‘누아르 장르 미술감독’(?)의 길을 걸은 셈이다.
네 감독의 특징: 반영웅의 정서적 공간
류성희는 좀더 흥미로운 말을 들려준다. “<올드보이> 때까지만 해도 내가 한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항상 나를 예술적으로 자극하는 것 같다. 그 사람들에게 영혼과 내면을 부여하는 건 감독과 배우의 일이지만, 그 사람들이 사는 공간의 외면을 만드는 게 내 일이다.” 류성희는 인물들이 비정상적인 것, 혹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중요한 요인이고, 그 비정상인들의 내면을 공간으로 외면화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올드보이> 때까지만”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그건 누아르라는 장르를 넘어 <괴물>에도 이어진다. 즉, 그녀의 장르적 세계인 누아르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가 말한 바로 이 인물들이다.
일례로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괴물>은 누아르가 아니다. 즉, 류성희가 류승완,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이 네명의 감독 사이를 잇는 공통점은 일상적인 스토리텔링 위에서 살아가던 인물이 ‘장르적 인물’로 변모해간다는 그 지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누아르의 관습적인 남자 주인공을 대신하여 여자들이 사건의 중심으로 뛰어든다. <살인의 추억>은 일상적인 농촌의 풍경이 아이러니한 시대 공기를 타고 어두운 장르적 공간으로 변모하는 그런 영화다. <올드보이>는 일반 소시민이 신화적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다. <달콤한 인생>은 그저 그렇게 잘 나가던 깡패가 존재론적 단독자로 위치 이동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괴물>과 맞서는 영웅은 어이없게도 한강 둔치에 있는 매점 부자다. 한마디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류성희의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장르적 세계 안에서 사는 ‘반영웅’들의 여러 모습이다. 이것이 류성희를 고리로 하여 네명의 장르영화 감독이 서로 닿아 있는 지점이다.
여지없이 <피도 눈물도 없이>부터 <괴물>까지 이 반영웅들이 주인공이다. 이건 그녀가 자신의 취향이 이끄는 대로 영화를 선택하는 것에 어떤 일관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그녀가 작업한 영화들, 그녀와 작업한 감독들 사이의 어떤 연계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반영웅이 등장하는 그 영화들은 대체로 그 인물들의 좌절과 실패의 귀결로 이어진다. 따라서 류성희가 이상한 주인공들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주로 근래에 만들어진 ‘한국 장르영화의 반영웅’, 혹은 ‘영웅이 되지 못한 실패자들’의 주요한 연속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인물들의 내면을 외면화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류성희의 말을 따르자면, 그녀는 지금 반영웅들의 내면을 외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정서적 공간이다. 혹은 물리적 공간에 정서적 공간이 어떻게 개입하는가가 류성희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이다. “봉준호 감독 영화 정도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 선의 영화인 것 같다”는 말은 그 이상을 벗어나 물리적 공간으로만 더 천착하는 감독과는 같이 일을 못할 것 같다는 표현이다. 일면으로 그녀가 참여한 영화들이 초역사적이고 탈시간적인 세트 공간의 정서를 확장하는 것도 크게 보면 한 방증이다. 그래서 우리가 류성희를 주목한다는 것은 최근의 한국영화 장르 속 반영웅 주인공들의 이런 정서적 공간이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주목하는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더 넓은 차원의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다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좌표는 또 바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장르영화 감독들을 교차해온 류성희의 현 좌표는 적어도 여기쯤이다.
“감독의 직관에서 질서를 찾는 게 나의 역할”
끝을 위한 에피소드. 이제 막 촬영을 시작한 <괴물>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류성희와 봉준호 감독은 한 문제를 갖고 장장 “네 시간의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문제의 사안은 한강 원효대교에서 달려 그 다음 지점으로 가면 실제로 바로 옆 다리에 도착해 있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편집상에서 해결하여 맞추느냐 하는 문제다. 즉, “지도에 있는 한강을 고수할 것이냐”, “한강이라는 공간의 정서를 고수할 것이냐”는 문제다. 전자는 봉준호 감독의 의견이고, 후자는 류성희의 의견이다. “감독마다 원하는 것, 요구하는 것이 다르지만 그 안에서 어떤 공간의 구조를 찾아 질서를 세워 보여주는 것이 영화미술 작업인 것 같다. 미술감독의 역할을 한줄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건 감독의 직관 안에 있는 그 많은 요소 안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일인 것 같다.” 이렇게 자기 자리를 지정하는 류성희는 <괴물>의 정서적 공간 구조를 생각하며 지금도 몇 가지를 보루로 남겨둔 채 버티고 있다. 그게 미술감독으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