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아줌마, 극장가다] 진짜는 따로 있어, <슬리피 할로우>
2000-02-15
글 : 최보은
팀 버튼의 매혹적인 전설의 고향 <슬리피 할로우>

“사실 난 죽은 놈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통통하고 싱싱한 뺨을 가진 놈을 가장 좋아하지요. 송장이 찾아올라치면 난 대문을 걸어버리지요. 고양이가 죽은 쥐를 싫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슬리피 할로우>를 보던 중에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놓고 주님하고 내기를 하면서 했던 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는데, 악마조차 이런 실정인 걸 사람들은 왜 귀신이야기를 좋아할까 싶어서였다. 귀신 입장에선 자존심 상할 얘기지만, 심지어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대체 왜 무서워하겠나.

그들이 더이상 우리 삶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데. 누가 저승 문턱을 넘으면 이젠 관계의 안전거리가 충분히 확보됐다 싶어, 비로소 긴장 풀고 덕담을 베풀기 시작하는 게 사람인데. 죽은 이들이 무서워지는 순간은, 산 사람들이 욕심탱천한 저의로 그들을 불러냈을 때뿐인데.

예를 들어 박정희의 유령이 무서운 건, 그를 무덤에서 불러일으킨 살아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고, <슬리피 할로우>의 목 없는 칼잡이가 ‘사자(死者)의 나무’를 박차고 달려나오는 것도, 살아 있는 자의 주문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귀신이란 ‘그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달려가 그대의 악몽이 되는’ 그런 존재란 거다. 산 자들의 재미를 위해서만 동원되는 존재. 애고 싱거워. 해답이 절로 나오네.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건, 죽은 놈들이 아니라 죽은 놈들이 설치고 돌아다니는 ‘이야기’로구나. 그래서 팀 버튼이 유령마을의 전설 <슬리피 할로우>를 영화로 만든 거고.

물론 판타지 왕국의 주거환경 개선지역 ‘슬리피 할로우’엔 말 탄 귀신만 있는 게 아니다. 얼굴에 횟가루를 뒤집어쓴 창백한 겁쟁이, 그 이름도 전설적인 이카보드 크레인 형사가 다락방에 기절해 있지 않다면, 그 기절초풍할 유머로 멍청한 마초 귀신을 도로 무덤 속에 몰아넣지 않는다면, 팀 버튼이 그 전설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두번 다시 들춰봤을 리 없지.

근데 이 매혹적인 선천성용기결핍증 형사가 후천성모가지결핍증 귀신과 벌이는 신나는 유머의 한판대결을 두고 대체 누가 ‘머리 없는 영화’라고 헐뜯은 거야. 불완전한 창조물이라서 외려 인간적이었던 에드워드 가위손을 탄생시킨 거대한 기계장치 좀 생각해봐. <슬리피 할로우>에선 그 덩치 작은 사촌들이 줄지어 등장하지. 중세의 고문도구들, 이카보드의 어머니를 죽이고 가두었던 기발한 장치들, 이카보드의 과학수사 발명품들. 바로 이런 비인간성, 불완전성, 쓸모없음이야말로 기계의 인간다운 면모라고 주장하는 듯한 발상들이 머리 없이 만들어졌다고? 눈을 홉뜬 채 피벼락과 함께 어린 아들을 향해 정면돌진하는 어머니의 시체를 좀 봐. 머리 없는 누가 이런 창조적 불경을 저지르겠어? 이거, 우리네 의식의 낡은 홈페이지를 향한 예술적 해킹이라고 봐.

몇십년 묵은 늙은이들이 다 그렇듯이 귀신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기 시작한 지 오래인 아줌마로선, 모가지를 도둑 맞아서 슬픈 짐승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해골바가지 찾겠다는 집념 하나로 산지사방 엉뚱한 모가지를 치고 다니는 꼴 하나만 가지고도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기야 머리통 없는 것들이 하는 짓이란 다 그렇지만.

아줌마는 목 없는 미치광이야 말 타고 날뛰든 말든, 팀 버튼의 시네마 천국 ‘슬리피 할로우’에서 살고 싶어진다. 이왕이면 인간사 백팔번뇌가 뿌리밑둥까지 새겨진 그 ‘사자의 나무’ 속에서 무해한 사자(死者)들과 더불어. 전설이 몽환의 숲 속을 질주하는 슬리피 할로우가 지금 여기 아줌마가 사는 곳보다 더 열악한 주거환경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들, 안불암씨처럼 몇초 뒤에 성을 갈게 될지도 몰라.

바퀴벌레적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바퀴벌레같이 목숨 질긴 음모이론을 찍어내고 있는 여기야말로 진짜 공포스러운 전설의 고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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