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순진함은 애초부터 없었어”, <슬리피 할로우>의 크리스티나 리치
2000-02-1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건방진 꼬마 녀석.” 참을 만큼 참았다. 손목만 남은 손이 허공에서 덮쳤을 때도, 음산한 여자가 공동묘지를 돌며 사지가 찢기거나 생매장당해 죽은 조상들의 사연을 읊어댈 때도, 페스터는 엄마와 황금을 위해 모든 고난을 감수했다. 그러나 웬스데이 앞에서만큼은 사기꾼의 조심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정신나간 어른들 틈에서 혼자 냉랭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 항상 검은 상복 차림이지만, 오히려 나이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젖살이 도드라지는 <아담스 패밀리>의 크리스티나 리치. 순진한 어린아이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던 그 아이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 이제 열아홉살이 되었다. 성장이 순탄했을 리 없다. <귀여운 바람둥이>로 영화를 시작한 열살짜리 반항아는 한번도 어른들이 기대하는 천진함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심지어 순도 100%의 아동용 영화 <캐스퍼>에서조차 아빠에게 훈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아이가 어디에 있을까.

“‘담배를 피우는 10대’이기 때문에 담배를 피운다”는 리치는 점점 정도를 더해갔다. 경동맥에서 피를 뿜으며 학예회를 마쳤던 웬스데이는 기괴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총 맞아 죽어야 할 놈”인 닉슨의 마스크를 쓰고 섹스를 하는 <아이스 스톰>의 웬디는 아동영화가 희석해온 리치의 불경함을 천연스럽게 드러낸다. 감미로운 첫경험 따위는 없다. 웬디는 남자애 앞에서 먼저 팬티를 내리고, 먼저 술을 마시고, 먼저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누구도, 닉슨의 부도덕한 얼굴로 가린 연한 살결의 표정을 알지 못한다. 길과 나무와 마음을 얼리는 폭풍 아이스 스톰. 그 한복판에서 리치는 “자유로운 어린 시절”이란 단지 윤색한 기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껄끄럽게 상기시켰다.

실제보다 세살 어린 나이로 설정된 <아이스 스톰>이 리치의 앳된 얼굴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다면, <섹스의 반대말>은 너무 큰 가슴을 동여매야 했던 리치가 드디어 붕대를 풀었던 영화다. “가슴 사이에 깊게 팬 굴곡이 환상적이어서” 캐스팅된 <섹스의 반대말>에서 리치는 자신의 육체를 활개치듯 과시한다. “10대들이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10대를 인정한다는 이유만으로 센세이션이었던 리치는 이 영화에서 어른들이 숨겨왔던 욕망과 마주하게 만든다. 냉담한 어조로 조롱하면서, “순진함은 애초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키울 생각 없다”고 끊어내듯 내뱉으면서. 그러므로 어린 시절의 악몽을 되풀이해 일깨우는 팀 버튼과 리치는 부정되었던 전설의 부활 <슬리피 할로우>에서 절묘하게 떨어지는 조화를 이룬다. 어린 천사를 연상시키는 소녀의 사악함과 목 없는 기사의 원한이 지배하는 마을의 악몽 속에, 반짝거리는 금발의 빛조차 창백해지는 리치. 마술처럼 이카보드(조니 뎁)를 사로잡지만 그녀는 연인에게조차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계속되는 영화 속 파격에도 불구하고, 리치는 집안의 모든 거울을 천으로 덮어두었다. 작은 키와 큰 가슴, 견딜 수 없던 사람들의 시선. 그러나 이제 솟아오르는 가슴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리치는 “귀엽게 보이거나 성숙해 보이는 건 내 마음에 달려 있어요”라며 자신을 보인다. 이제 성인식을 준비하는 것일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나는 아직도 10대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10대일 거예요.” 다시 한번 조니 뎁과 만나는 샐리 포터의 <눈물 흘린 남자>(The Man Who Cried)에서 그 젊음이 어떻게 뒤틀려서 발산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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