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떤 슬픔은 나눠지지 않는다
삶에서 부딪치는 어떤 고통은 도저히 나눌 수가 없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표어가 잘못된 수학공식처럼 다가오고, 그때 고통은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 가끔은 햇볕에 말려두는 일 외에는 어찌 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오래 삭아서 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그것’은 그러나 아직도 바싹 마른 낙엽처럼 손 안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낸다.
교통사고로 쌍둥이를 잃은 여자가 짐승같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녀는 내게 오직 ‘아이가 있나요?’라고 물어 보았을 따름이다. ‘네’라는 짧은 대답이 신호탄이 된 듯 그녀의 올라간 어깨가 내려올 줄 모른다. 이런식의 파도는 진저리 쳐진다. 끝모를 늪에 빠졌는데 붙잡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제 새끼를 핥아주지 못하는 어미의 타액이 눈물이 되어 흐를 때, 세상의 모든 피란 죄다 그녀의 손으로 우우하고 몰려든다.
두 여인: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상인 그들
차에 치어 죽어 있는 아이의 시점에 5년 전 내 앞에서 울던 그녀가 뛰어들어왔다. 알모도바르의 카메라 속으로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뛰어들어왔다. 간호사인 마뉴엘라는 지금 하나뿐인 아들을 잃어버렸다. 작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의 아들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공연하던 위마에게 사인을 받으려다 차에 치어 죽었다. 장기 이식 담당 간호사인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아들의 심장을 누군가에게 주려한다. 아들의 심장과 함께 그녀의 심장도 세상을 떠돌 것이다.
평생 아이를 가진 적이 없는 여자가 있다. 풍요한 대지의 숨소리 대신 한뼘의 연극 무대를 택한 여자. 여배우 위마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의 공연에서 심장 모양의 보석을 찾아 헤맨다. 그녀는 <이브의 모든 것>의 베티 데이비스처럼 줄담배를 피우며, ‘그가 누구이듯 타인의 친절에 기댄다.’ 아들을 잃은 마뉴엘라가 위마의 분장실을 찾아왔을 때, 두 여인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마뉴엘라와 위마는 서로에게 거울상인 것. 분장실의 거울은 처음엔 삼중으로 분열된 위마를 비추다 문을 열고 세명의 반사된 위마 사이에 낀 마뉴엘라를 잡는다. 위마의 뒷모습이 마뉴엘라와 일치되고 장면이 바뀌면 위마 대신 마뉴엘라가 거울 앞에서 삼중의 상으로 분열되어 있다. 알모도바르는 이런 식이다. 그는 대가답게 한번의 붓질로 모든 것을 해낸다. 두 여인은 상처로 분열되어 있고 서로는 서로를 모른다. 우리는 이제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그들의 심장과 우리의 심장을 찾아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연극와 영화는 하나로 연결되어 삶의 테두리를 넘나들고, <이브의 모든 것>은 ‘여자의 모든 것’이라는, 그래서 이 영화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관한 영화가 될 것이다. 운 좋게도 한 여자는 줄 줄을 알고, 한 여자는 받아만 왔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 버거운 여자들의 연극 사이로 삶의 추를 질질 끌고다니는 또 한명의 여자 배역이 필요해진다.
세 여인: 그들의 고통은 남자로부터 왔다
수녀 로사는 전에 한 남자를 만났다(혹은 한 여자를 만났다). 롤라는 여장 남자로 파리에 간 적이 있다. 남자는 돈을 벌기 위해 파리에 갔다. 말이 서툰 스페인 남자는 게이가 되는 것 외에는 큰 돈을 벌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아내보다 더 큰 가슴을 가지게 되었고, 그럭저럭 돈벌이를 하다 고향에 찾아온다. 아내가 떠난 뒤 남자는 늘 자신이 누구인가 고민하고 있었고, 몹쓸 병을 얻은 그는 요양소에서 아름다운 수녀를 만났다. 남자가 진짜 자신이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자, 로사는 그 시험에 응한다. 그러나 남자는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수녀는 여장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모든 여주인공들은 세상에 대해 상처를 입을 때마다 붉디 붉은 진홍의 코트를 입고 나타난다. 에스테반이 사고로 죽었을 때, 위마가 연인이자 같은 배우인 니나를 잃었을 때, 그리고 로사가 수녀로서의 순결함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알모도바르의 원색의 색감은 이제 과거의 신경증적인 본능의 색깔이 아니다. 그것은 피이고 고통이고 감정이고 생생함이다. 그리고 알모도바르는 그 고통이 남자들에게서 왔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가 같은 두명의 아들, 마뉴엘라와 로사의 아들 에스테반은 죽어가고 있다.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딸을 알아 보지 못한다. 나머지 멀쩡한 남자들은 ‘그 짓’만 생각한다. 로사는 여장 남자인 롤라에게서 에이즈를 함께 얻었다. 롤라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마리아상을 훔쳐간 남자이니 로사에게서 성스러움과 순결한 자궁도 함께 훔쳐간 것은 당연한 일. 마뉴엘라는 로사의 임신을 ‘사고’라고 표현한다. 여자들은 약탈당하는 가운데서 살아간다. 함께 살아간다.
네 여인: 슬픔을 극복하는 여성공동체
몸속에 꽉 찬 실리콘 외에는 진짜가 아닌 여자가 있다. 게이인 아그라도는 눈 한쪽에 8만, 가슴 한쪽에 7만을 주고 여자를 샀다. 위마와 니나 대신 무대에 선 날, 그녀는 ‘돈이 들수록 그만큼 내가 꿈꾸는 나에게 가까워진다’고 관객에게 가르쳐준다. 그녀의 여성성의 재현이야말로 <내 어머니…>의 웃음이자 뭉클함의 원천이다. 영화학자인 아네트 쿤이 지적했듯이 <뜨거운 것이 좋아> 이후로 할리우드의 복장 도착자들은 장르의 법칙 안에서 대부분 놀림거리나 웃음거리가 되어왔다.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든 도망가기 위해서든 가발을 씌우고 가슴을 만드는 장면을 첨가하여 이들이 실은 남자임을 알려주고, 영화는 치마입은 남자들의 코미디나 호러가 되는 전법. 일명 할리우드의 이성애 신화라 불리우는 이데올로기 전략은 가부장제의 제물로 복장 도착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그라도는 당당히 이러한 육체의 덫에서 놓여나서 자신이 여자임을 선언한다. 오히려 아그노라는 이 사회가 남근고착(Cock Obsessed)이 되어 있다고 전언한다. 약물에 찌든 니나가 여성이면서도 진실한 여성성을 재현하지 못하는 데 반하여(<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스텔라라는 임산부 역을 맡은 그녀는 아그라도에 의해 임부복이 벗겨지고 가짜로 솜을 두른 배가 드러난다.) 아그라도는 묘하게도 가슴과 남근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고 그 양성성을 뛰어넘어 진짜 여자의 성차(gender)를 표상화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결국 니나 대신 아그라도는 의존적인 여배우 위마와 한쌍을 이루면서 그녀의 삶과 연극을 결합시켜준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고통에서 시작하여 행복으로 끝이 난다. 마뉴엘라를 중심으로 네명의 여자는 얼기설기 얽히더니 일종의 여성공동체를 이루며 슬픔을 극복해간다. 희생과 용서. 에스테반의 사인 요청을 거절했던 위마는 마뉴엘라에게 속죄하고, 마뉴엘라는 자신을 배신한 롤라를 용서해준다. 삶이 주는 진물을 이겨내는 용기 관용 연민. 그것은 가장 여성적인 것들에서 온다. 알모도바르의 주제는 끝내 여성성이다.
알모도바르: 키치적 스타일은 어머니의 가슴으로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할리우드식의 통속과 멜로를 겸비하고 있다. 그것은 취향으로써의 눈물과 과잉 내레이션에 호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롤라와 로사, 마뉴엘라의 삼각관계는 다시 니나와 위마 아그라도의 삼각관계와 겹쳐지고 자그만치 세명의 에스테판이 나와서야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게다가 어머니들에게 가해지는 비극은 사회적인 동인을 찾기보다 여성공동체적인 안전함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알모도바르가 놀라운 것은 이들 각각의 전략이나 징후적 해독에 있기보다는 이러한 모든 것을 한데 섞어 만들어내는 놀라운 통합능력이다. 하이힐을 신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은 비밀의 꽃을 먹더니 이렇게 성숙한 어머니가 되어 돌아왔다. 알모도바르는 원숙해졌고 당당해졌으며 삶의 진실에 성큼성큼 다가선다. 독버섯같이 피어오르는 욕망에 돌진하던 마타도르(투우사)의 역할을 자임하던 그가, 조롱과 냉소가 빚어내는 배설물들을 뒤로 하고, 자신의 키취적 스타일을 고스란히 어머니의 가슴에 이식시킨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이식수술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말할 나위없이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알모도바르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멜로라는 장르가 더이상 여성 영화의 어법에 대해 항체 항원의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 멜로라는 장르가 더이상 여성관객의 호주머니를 우려내는 정서적 굴착을 중지하고 진정으로 여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목격하는 일은 일종의 신비였다.
로사가 죽은 뒤 2년 만에 마뉴엘라는 에스테반을 데리고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온다. 20년 전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도망갔었다. 철로를 오가는 두개의 기차처럼 마뉴엘라는 상처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 상처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팔 안에는 로사가 남긴 아들 에스테반이 있다. 에스테반은 이제 에이즈에서 회복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두려움과 편견에 감염되었던 우주의 자궁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상처가 순환하기 때문이리라. 우리시대의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들이다. 그것이 천형 같은 에이즈를 몰려받은 에스테반이 회복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기적은 아닐까?
에필로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다
교통사고에서 나온 보상금이 그녀에게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그녀가 자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학교다닐 때 환자가 울면 같이 울지 말라고 배웠다. 그것은 동정이라고, 그것은 공감과 다른 것이라고 배웠다. 동정은 환자를 치유시킬 수 없다고, 오직 공감만이 삶의 안내자가 될 수 있노라고. 공감은 환자가 울 때 슬그머니 티슈를 집어주며 고개를 끄떡이는 것이라고 들어왔다.
그날 나는 그녀와 함께 울었다. 눈이 뻘게지도록 실컷 울었다. 너무 눈이 뻘게서 그녀도 나도 세수를 대여섯번이나하고 면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어떤 고통은 나누어질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다고. 그런 건 수학책엔 없지만 삶의 교과서에는 책갈피마다 숨겨져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