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바지를 쓱 벗는다. 멀쩡한 탈의실을 놔두고, 기자가 보는 앞에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본의 아니게 그의 팬티 색깔을 보고 만다. 몸매 근사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꼭 저렇게 뽐을 내야겠냐, 싶어 얄밉지만 이미 봐버린 장면의 잔상이 가시질 않는다. 며칠 전 베니스에서 촬영하고 온 고추장 CF 얘기를 하다가 “처음엔 싫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너무 좋아. 내가 옷을 고추장스럽게 입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라는 말의 뜻이 분명해진다. 슈트를 갖춰입고 새파란 넥타이까지 매고 나더니 전신 거울에 자기 모습을 지그시 비춰보고 표정없이 말을 잇는다. “음, 됐어, 좋아.” 옷입는 일만 10년을 해온 차승원은, 스크린 밖에 있을 때만큼은 누가 봐도 그 일만 죽을 때까지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혈의 누>가 개봉하기 직전에 온라인 팬페이지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죽을 때까지 분투하면서 연기만 하겠다.”
차승원의 시나리오 선택 기준은 “장르가 뭐건 간에 재미있는 영화”다. 코미디를 아는 남자. “관객이 200만, 300만명 됐을 때의 희열”이 마약 같아 그 어떤 영화를 선택하더라도 관객의 기대와 시선을 저버릴 수 없는 배우. 그런 차승원이 장진을 만났다. <혈의 누> 촬영이 막바지에 이른 2월, 차승원은 <박수칠 때 떠나라>의 시나리오를 받고 별 고민없이 출연 결정을 내렸다. “<혈의 누>는 여러모로 힘든 영화였기 때문에 지쳐 있었고,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게 필요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호텔 안에서 벌어진 살인을 둘러싼 수사극이다. 진범을 찾으려는 수사과정과 살해동기를 지닌 인물들의 비밀을 진지하게 캐는 정극이면서 장진 특유의 유머가 있는 희극이다. “장진 감독의 코미디는 내가 해온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내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다분히 마니아적인 영화”라는 차승원은 “장진 감독은 차승원이라는 다분히 대중적인 배우를 만나서 자신의 성향을 약간 희석시킨 거고, 차승원은 장진이란 감독을 만나 자신의 필모를 더 풍부하게 만든 셈”이라고 설명을 보탠다.
수긍할 만하다. 인터뷰가 있던 날, 모 여대 학보사에서 활동하는 풋풋한 여대생들 네명이 언론사 견학차 <씨네21> 사무실을 방문한 김에 스튜디오까지 들어오게 됐는데, 보통의 배우들이라면 낯선 기류가 불편해서 모른 척해버리고 말 불청객들을 차승원은 그새 짬을 내 신경을 쓴다. 어떻게들 오셨어요,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오늘 진짜 좋은 거 구경하시는 거예요. 차승원이 출연한 코미디영화를 한편쯤은 봤을 것이 분명한 소녀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도 까르르 까르르, 저희끼리 수줍게 웃어대자 차승원이 더 흐뭇해하는 눈치다. “딴 거 다 필요없고 개봉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9명은 우리 영화 개봉일이 8월11일이라는 거 하나만 알게 하자”고 감독에게 마케팅 목표를 전달한 배우가 자기 영화를 봐줄 대중의 일부를 상대로 자그마한 홍보활동에 성공한 셈이니까. 돌아가는 소녀들에게 친절한 작별인사마저 건넨다. 키크고 잘생긴 배우가 허리를 굽혀 얼굴을 들이대니 소녀들의 얼굴이 모조리 발갛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들은 차승원의 신작을 보러 극장에 꼭 갈 것 같다.
“난 좀 가만히 놔둬야 돼. 이렇게.” 차승원은 기다란 두 다리를 소파 위로 끌어당기더니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는다. 몇십초쯤 지나서야, 열심히 꼼지락거리는 왼쪽 발가락들이 눈에 띈다. 기자가 와하하 웃자 그는 “사람들의 기대치가 있고 짐작하는 내 이미지가 있다. 근데 어떤 캐릭터를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만 보여줘서도 안 된다. 다른 배우들은 가만히 있냐고. 계속 새롭게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내가 여태까지 해온 방식들이 옳지 않았으면 안 먹혔을 것 아닌가. 근데 얼추 맞았고 먹혔단 말이다. 그러니까 그걸 별로 버리고 싶지도 않은 거다. 그래서 힘들지, 무지하게”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잘해오던 것 하나를 해보인다. “순창아아아아아아아∼.” 이 글자들만 보아도 그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듯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