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한텐 다섯장만 샀다고 거짓말하고 열장 사서 꼭꼭 숨겨두었던 밀레니엄 복권이 꽝나고 만 지금, 아줌마는 다시 몇장 배춧잎 앞에 충성맹세하고 비상근무중이다. 아니, 사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창 비상근무중이다. 아줌마도 <비상근무>(Bringing Out the Dead)의 프랭크 피어스처럼 구급요원이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인간의 헤벌어진 오장육부 같은 뉴욕 뒷골목을 헤매는 구급요원인데 비해, 아줌마는 자신의 미로 같은 오장육부 속을 헤매는 자신 목숨의 구급요원이라는 점이 다를뿐. 초기 프랭크가 그랬듯이 아줌마도 숱한 목숨 구했다. 열한살 아줌마, 열다섯살 아줌마, 열여덟, 스물, 스물다섯, 스물아홉, 서른… 그 많은 아줌마들을 구한 건 다 아줌마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타율 100%를 기록했을리야. 아줌마 또한 기술부족으로 숱한 목숨 죽였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산소주입기를 잘못 꽂아 열여덟 꽃다운 여인을 죽였다면, 아줌마는 정액주입기를 잘못 꽂아 숫처녀 아줌마를 영원히 죽여버렸다. 그 자책감으로 프랭크는 불면증 및 알코올과 결혼했고, 아줌마는 불면증 및 알코올 및 문제의 정액주입기와 결혼했다. 상대는 달라도, 그 치명적 결합이 사람 망치고 만 건 매일반이다. 프랭크가 앰뷸런스를 몰고 뉴욕 뒷골목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이던 90년대 초반 무렵, 아줌마는 자유로를 오가는 숱한 운전자들의 머릿속에 ‘요주의’ 딱지와 함께 각인된 ‘광란의 티코’였다. 아니, 삶 자체가 광란의 티코였다. 프랭크는 큰 차 큰 슬픔, 아줌마는 작은 차 큰 슬픔. 슬픔은 차의 크기와 비례관계에 있지 않군.
어쨌거나, 비슷한 건 또 있다. 프랭크가 문제의 사고 뒤, 어느 환자의 목숨도 제대로 건지지 못하듯이, 아줌마 또한 사고친 뒤 자기 껍질 속에 살아 숨쉬던 수천수만의 생명력들을 하나씩 둘씩 아니 보름밀린 때처럼 한꺼번에 우수수 하수구 바닥으로 나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아줌마들은 프랭크를 괴롭히는 열여덟살 유령처럼 시시때때로 귀신의 눈을 하고 나 살려내, 나 살려내, 돌팔이 구급요원 아줌마를 째려본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 ‘죽은 자 불러내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프랭크와 자신을 조목조목 비교해보던 아줌마는, 자신 또한 시시때때로 죽은 자신의 유령을 불러내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유령과 마주치고, 간절히 용서를 빌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대두 하면서.
이쯤 되니까, 대체 나 살아 있는 것 맞아?, 하는 의문이 ‘식스 센스’적으로 아줌마 발상의 반전을 명령한다. 어쩌면 감독과 작가가 명명한 ‘죽은 자’는 죽은 듯 살아 있고 산 듯 죽어 있는 우리네 삶을 총칭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 것일까. 영화는 죽은 우리를 불러대고 있는 건 아닐까. 눈에 비치고 마음에 꽂히는 모든 게 ‘거짓말’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리빙 데드’들이 나뒹굴고 있는 곳이 어찌 뉴욕의 뒷골목만이랴. 지금 장안의 언론을 장식하는 벤처자본가들, 증권가의 벼락부자들이 떼지어 몰려가고 있는, ‘부와 귀로 포장된’ 그 깨끗한 거리가, 사실은 디지털 그래픽으로 조작된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한단 말인가.
그래,‘노장사상’적 비약이라고 해도 좋아. 아니 이 아줌마 지가 무슨 김용옥인줄 착각하고 있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마틴 스콜세지는 티베트에 도닦으러 갔다가 접경지대 ‘노장’의 팔팔한 유령을 만나고 온 게 틀림없어. 그 유령의 계시를 구급요원의 가방에 담아, 뉴욕의 비열한 거리로 돌아온 게.
그렇다고 아줌마까지 ‘노장’을 만난 건 아닌 모양인지, 프랭크와 아줌마의 차이점 딱 두 가지를 깨닫곤 배가 심히 아파진다. 뭐냐면, 영화주인공인 한쪽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백만장자 슈퍼스타로 돌아간 반면, 엑스트라도 못 되는 아줌마는 영원히 철야를 밥먹듯이 하는지 목숨 구급요원으로 썩어간다는 점. 그리고, 한쪽은 결국에는 패트리샤 아퀘트의 품속에서 천사같이 잠들 수 있는 반면, 한쪽은 지금도 ‘어디 마약 없수?’ 하면서 비열한 거리를 헤매고 있다는 점.
아, 이땅의 마틴 스콜세지들은 다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죽은 아줌마 좀 안 불러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