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박하사탕> 공짜 관람기
2000-01-18
글 :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웹진 weiv 기획실장)

‘나이들면 공짜 좋아한다’는 말은 이 아저씨에게도 예외가 아닌 모양인지 하루 전에 전화를 받고 토요일 오후 서울의 중심으로 달려갔다. 목적지는 영화 <박하사탕>의 특별 초청 시사회장이었는데, 전해 들은 바로는 초대 대상이 ‘30대 이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라고 했다. 뜻하지 않게 ‘리더’도 되었고 난생 처음 ‘리셉션’이라는 자리도 갖는다니 기회를 놓칠쏘냐.

‘한국사람들이 제시간에 시작하겠어’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20∼30분 늦게 도착한 극장(아니 공연장) 안의 객석은 사람들로 빼곡이 차 있었다. ‘공짜 좋아하는 한가한 오피니언 리더들 꽤 많네’라는 생각 한편으로, 선 채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라도 빈틈은 있는 법, 앞에서 세 번째 줄에 빈자리가 시야에 들어왔고,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리 있나요”라고 물어본 뒤 침묵은 수긍이라는 판단으로 염치없게 자리에 앉는 순간, 옆에 앉은 관객은 마치 ‘지하철에서 자리만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중년 여인’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때마침 달리는 기차 앞에서 한 사람이 서서 ‘아아아아아악’하고 소리치는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면 나의 무안과 옆자리의 핀잔은 더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타임머신을 탔다. 1999년의 시점에서 1979년이라는 시점으로 거슬러오르면 전개되는 사건들은 악몽처럼 다가왔다. 영화는 잊고 싶은 순간들만 골라서 보여주기로 작정한 듯했다. 나의 뇌는 무겁게 짓눌린 채로 사고의 노동을 강요당했다. 주머니에 늘 가지고 다니는 타이레놀 두알을 지근지근 깨물어 먹어도 소용없었다. 1980년의 장면이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남들과 다르다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이 아니라 내무반에서 비상 출동하는 장면이 더했다는 점이다. 반합에서 박하사탕이 쏟아지는 모습, 엉성한 군장 뒤 비뚤어진 모포와 부삽의 모습, 헐레벌떡하면서 집합하는 병사들의 모습 등등.

군대를 이상하게(이른바 ‘강제징집’ 대상이었다) 다녀온 뒤 나는 6개월에 한번씩 ‘군대에 끌려가는 꿈’을 꾼다. 그때마다 ‘저 제대했는데요’라고 항변해도 ‘까라면 까라’는 군대식 막무가내 앞에서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깬다. 주기가 길어지고 있지만 최근에 꿈을 꾼 게 아직 1년을 못 넘기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 까불거리던 심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속으로부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심난함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지난 10년을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게’ 살아왔다는 알량한 자부심에도 금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쯤해서는 감동이 원망으로 바뀌었다. 물질적 공짜의 정신적 대가는 비쌌다. 황금 같은 주말 오후를 이리도 정신사납게 보내야 한다니, 흑.

게다가 보수언론 <조선일보> 기자부터 진보적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찬사 일색인 간담회장의 분위기는 내 못난 ‘내추럴 본 마이너 근성’을 자극하여 원망을 아예 불평으로 바꿔버렸다. “때아닌 과거 타령이람”,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는 없잖아”라는 투덜거림으로 시작하여, “1970∼80년대 문학의 그다지 새롭지 않은 감성야”라는 시건방을 거쳐, “타지역 출신 사람의 광주에 대한 원죄의식야”라는 ‘망발’까지. 영화의 내용이나 구성보다는 ‘좋은 영화가 흥행이 될까’라는 토론이 주가 된 간담회장의 분위기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리셉션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박하사탕이 도대체 어떻길래’라는 생각이 들어 구멍가게에서 박하사탕 한통을 사서 두알을 입에 물었다. 처음에는 빨아 먹다가 결국은 평소 습관대로 어금니를 총동원하여 아작내버렸다. 박살난 알맹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간 뒤에도 휘산성 물질이 남긴 기운이 입 속을 오랫동안 감돌았고, 이빨 짬에 끼인 알갱이의 잔재는 손톱을 사용해도 안 빠졌다. 이런 거였나. 갑자기 나에게 과거는 이런 쌉싸래한 기운으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그런데 요즘 젊은애들은 박하사탕 잘 안 먹던데. 며칠 뒤 영화를 본 한 젊은 후배한테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난 역사 다루는 영화 싫어. 형은 6·25영화 좋아해?”라고 말했다. 그때 들었던 나이주의(ageism) 가득한 생각. “얘들 나보다 훨씬 심하네. 얘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지”

※ 추신: 명계남 선생님, 멋지게 싸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창동 감독님은 기다렸는데 못뵈었네요. 사인받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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