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김선아, 선아물, 그리고 그의 남자들
2005-08-16
글 : 강명석 (기획위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기억하고 있으나 언급하지 않는 것. 김선아는 슈퍼모델 출신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한 때 김선아의 슈퍼모델 참가 동영상은 <성형의혹 연예인>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인터넷에 떠돌았었다. 물론 지금 그에 관한 옛날 가쉽을 들추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슈퍼모델 출신, 성형의혹, 예쁜 외모. 적어도 데뷔 당시의 그는 외모 하나로 연기한다는 편견에 빠지기 매우 쉬운 배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이 악물고 시럽 잔뜩 넣은 라떼를 참는 <삼순이>가 됐다.

‘선아물’을 아시나요?

그러나 이건 한 배우의 용감한 방향전환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거침없이 욕을 하는 김선아의 모습에 놀랐다면, 그건 지금까지 평균 전국 160만 이상은 본 ‘선아물’ (그가 중심에 서지 않은 <예스터데이>와 <몽정기>는 제외)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선아는 현재 한국 여배우중 유일하게 자신의 캐릭터 자체를 장르화시켰다. 이는 자신의 캐릭터보다는 배우 개인의 매력에 큰 비중을 두는 문근영이나, <내사랑 싸가지>부터 <형사>까지, 혹은 <신부수업>부터 <색즉시공>까지 장르와 흥행 성적을 가리지 않는 다작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힌 하지원과도 다르다. 오히려 김선아의 행보는 (작품 수나 기간에서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주성치나 성룡같은 홍콩 배우들과 비슷하다. 주성치나 성룡의 영화는 그들이 출연하는 것만으로 기대되는 내용이 있고, 그에 상응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마치 연례행사처럼 그들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있다.

김선아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예스터데이>와 <몽정기>를 제외한 김선아의 나머지 작품들에서 김선아는 늘 ‘평범한 한국여성’이 되었고, 바로 그들의 일상 자체가 영화의 스토리였다. <위대한 유산>은 청년 실업자 남녀의 이야기였고,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역시 궁상맞은 남녀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S 다이어리>는 아예 김선아의 연애담으로 영화 전체를 채웠다. 김선아가 액션 히로인이 된 <잠복근무>에서도 재미의 근원은 액션이 아니라, 고교에 잠입한 대가로 수학 문제 하나 푸는데 머리를 싸매고, 일이 안 풀리면 동료 형사와 소주를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하는 평범한 여성 캐릭터에 있었다. ‘선아물’은 바로 이런 <평범한 여자> 김선아가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공식화 시킨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없는 여자

물론 이는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김선아가 지금 가지고 있는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기도 했다. <위대한 유산>부터 <내 이름은 김삼순>까지 김선아는 어떤 캐릭터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설정들이 필요했다. 우선 김선아의 작품에는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생활력 강한(혹은 경제적으로 문제없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김선아와 기존의 부모 자식 관계보다 훨씬 밀착된 관계를 형성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차라리 외박하고 사고라도 치길 바라는 박봉숙 여사의 모습은 <S 다이어리>에서 딸이 남자를 사귀자 <피임>부터 걱정하는 친구 같은 어머니(김선아는 여기서 어머니의 성을 쓰는 것으로 설정된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만큼 김선아는 가부장제속의 아버지, 혹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권위적인 부모로부터 자유롭고, 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그래서 김선아는 ‘욕설’과 ‘섹스’로부터 자유롭다. <S 다이어리>나 <내 이름은 김삼순>처럼 선아물 속의 김선아는 섹스에 거부감도 없고, <잠복근무>와 <내 이름은 김삼순>처럼 성욕에 솔직하지만(‘너무 굶어서 그래’), 그렇다고 섹스‘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에겐 ‘합체!’를 외칠 정도로 섹스에 적극적이지만, 그렇다고 눈 맞으면 아무 남자와 섹스하는 캐릭터도 아니다. 김선아는 요부 아니면 정숙한 여자라는 이분법을 뛰어 넘어 섹스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욕설도 마찬가지다. 한국 영화에서 남성 캐릭터는 신분에 상관없이 거침없이 욕설을 할 수 있다. 현직 검사나 기업 CEO도 얼마든지 욕설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지적 수준이 의심받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조금 더 ‘터프’한 남자로 묘사될 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성의 욕설은 금기시 되거나, 혹은 그의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공주님처럼 하늘하늘한 의상을 입고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하는 여성이 욕설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김선아 이전에 여성 캐릭터의 언어 세계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들었던 김정은을 생각해보라. 그의 언어유희가 가장 빛났던 캐릭터는 ‘열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불어라 봄바람>의 ‘다방 레지’와 사투리 모드만 되면 ‘허벌나게’ 욕할 수 있었던 <가문의 영광>의 ‘조폭 따님’이었다. 여성의 욕설은 그가 내숭을 떨고 있다는 것, 혹은 그의 원래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위대한 유산>

하지만 김선아에겐 이런 설정이 없다. 백조이긴 하지만 어쨌건 퀴즈쇼에 도전할 만큼의 지적수준을 가진 캐릭터로 나오는 <위대한 유산>에서도 임창정과 말싸움을 할 때는 물론, 출판사에서 편집을 담당하는 것으로 설정 된 <S 다이어리>에서도 ‘내가 씹다 버린 껌이냐’면서 남자들에게 할 말 다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잠복근무>에서는 학교 짱인 홍수아에게 ‘껌씹는 컨셉’ 버리라며 인정사정없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하는 일만 보면 참 예쁘고 고상할 것 같은 파티쉐이면서도 ‘미친 새끼’같은 욕설은 기본에 ‘우동면발 미끄러지는 소리 하네’, ‘뭘까나 이제 꼬지 못해 까나?’같은 퍼포먼스에 가까운 언어유희를 마음껏 선보인다. 이는 ‘선아물’의 장르적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이 쉴 새 없이 던져주는 언어유희의 재미.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대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소화하는 김선아의 연기력이 있기에 가능하지만, 이런 대사가 가능한 것은 ‘섹스’와 ‘욕’에서 자유로운 김선아의 캐릭터가 곧 지금까지 이 두 가지를 통해 규정된 여성의 신분과 성격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섹스와 욕이 어떤 전형적인 여성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평범한 여성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관객들은 예상외의 캐릭터가 주는 재미를 맛본다. 그건 우리의 현실에선 쉽게 볼 수 있지만,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캐릭터의 등장이었다. 김선아가 웃긴 것은 욕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여성, 그래서 적당히 매력적이면서 적당히 평범한 여성이 현실에 밀착된 코미디를 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 파티쉐가 아니라 우연히 재벌 2세와 사귀게 된 술집 여성쯤으로 묘사됐다면 삼순의 언어유희는 지금만큼의 재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유산>에서 임창정과 포옹을 할 때 갑자기 분위기 깨는 대사를 날리는 김선아의 모습을 보라. 그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면서도 ‘도발적으로 시작해 순종적인 여성으로 변하는’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김선아의 특징은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를 지나 <S 다이어리>까지 오면서 ‘선아물’이 되었다. <S 다이어리>를 통해 김선아는 명실상부한 ‘원톱’이 됐고, 이야기의 중심은 남녀의 사랑에서 여성의 이야기로 옮겨졌으며, 김선아의 코미디란 적당한 섹시함과 적당한 코미디, 그리고 그 속에서 늘 자신의 일과 ‘별 볼일 없는’ 남자 문제로 고민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규정지어졌다. 늘 남자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S 다이어리>의 김선아와 남성들의 세계 속에서 오직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는 액션 히로인과 소주를 원샷하는 여자의 모습을 함께 지닌 <잠복근무>는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여성과 여성들이 바라는 여성으로서의 김선아의 캐릭터를 둘로 나눈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김선아는 드디어 나이 어린 ‘삼식이’를 잘 어르고 달래서 ‘연애질’을 해나가는, 평범하지만 일 잘하고 속 깊은 롤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원톱이 가능한 여배우

그만큼 ‘선아물’의 성공은 극적이다. 성형논란에 시달리던 슈퍼모델 출신의 연기자는 어느덧 자기 자신의 이름만으로 전국 관객 160만을 이끄는 배우가 되었고, 한국에서 가장 평범한 여성을 잘 대변하는 캐릭터가 되었으며, 그것은 곧 한국에서 여배우, 더 나아가서 여성 관객 / 시청자의 지분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보여준다.

<위대한 유산>과 <내 이름은 김삼순>은 모두 ‘선아물’의 범주에 넣을 수 있지만, 그 성격은 엄연히 다르다. 그것은 <몽정기>와 <위대한 유산>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몽정기>의 김선아는 예쁘지만 도도하지 않고, 조금은 어리숙하며, 자신이 짝사랑했던 선생님을 사랑하는 교생이었고, 이는 <몽정기>의 내용이 그러하듯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캐릭터였다. ‘섹시한 여자 = 도도함(혹은 백치미)’이라는 남성적인 편견 속에서 김선아의 유머감각은 그런 섹시함을 부담스럽지 않게 일상으로 끌어올 수 있는 역할을 하는데 머물렀다. 아무리 김선아가 빛나는 재치를 발휘한다 해도, 그 때 남자들이 그에게 기대한 것은 <몽정기>의 학생들의 상상 속에서 가죽 채찍을 들고 온갖 요염한 포즈를 취하는 김선아의 모습이었을 뿐, 그런 상상속의 교생 선생님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하는가가 아니었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반면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김선아는 여전히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이되 섹시함을 과시하지 않고, 남자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별 볼일 없는 남자와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키워가는 캐릭터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의 김선아는 여전히 ‘섹스’와 결부되어 있다. <위대한 유산>에서 김선아는 자신이 원치 않는 ‘비디오’를 찍은 것으로 설정됐고,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제목부터 김선아의 섹시함을 어느 정도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반면 <S 다이어리>와 <잠복근무>의 김선아에게 섹스란 자신의 ‘선택’이 되고, <S 다이어리>에서 섹스는 남성의 눈요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일상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 ‘선아물’의 관객층은 김선아의 섹시함과 임창정, 차태현같은 배우들의 걸쭉한 코미디를 기대하는 남성들로부터 김선아에게서 공감을 느끼고자하는 여성들로 변하기 시작했고, 작품 속의 직업 역시 백조와 볼링장 여직원에서 액션 히로인과 파티쉐로 변했다.

선아의 남자들

특히 김선아의 상대역이 된 남자들의 변화는 ‘선아물’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선아물’의 시작을 알리는 두 편의 작품에서 김선아가 백조거나 저소득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곧 상대 남자의 수준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모두 여자에게 일편단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잘난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닌 전형적인 ‘찌질이’가 자기 주변에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기 주변에 있는 여자’란 설정은 ‘안젤리나 졸리가 될 수 있는 몸매’를 가진 김선아의 출연을 통해 주변에 있는 ‘보기 드물게 예쁜’ 여자가 되고, 능력도 안 되고 외모도 평범한(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임창정과 차태현이 ‘잘생겨서’ 스타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자는 오직 그녀를 사랑한다는 진심 하나만으로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로맨틱 코미디의 새로운 유형을 보여줄 김선아의 캐릭터를 발견했지만, 더불어 그를 남성 판타지의 대상으로 이용한 셈이다.

그러나 <S 다이어리>와 <잠복근무>의 김선아는 남자를 ‘가린’다. 김선아의 캐릭터가 점점 ‘선아물’로 자리 잡아 가면서 김선아는 어느덧 번듯한 직장여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상대 남자들의 직업역시 업그레이드 됐다. <S 다이어리>의 세 남자는 경찰, 신부, 그리고 부유한 집 자식으로 예술적인 감각을 갖춘 남자 등으로 설정됐고, 김선아는 드디어 멀쩡한 사랑과 자신이 원하는 섹스를 시작한다. 또한 <S 다이어리>는 <위대한 유산>이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처럼 남자의 궁상맞은 변명이나 ‘찌질한’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앞의 두 작품은 그것을 남자의 진심으로 포장했고, 여성은 다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됐지만, <S 다이어리>의 김선아는 그 남자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사랑하고, 기대와 다른 남자의 모습에 실망하며, 남자들의 무책임한 배신에는 응징으로 맞선다. 그리고 <잠복근무>에서는 어느 한군데 빠질 것 없는 괜찮은 남자와 정말 주먹다짐을 하며 사랑에 빠지더니(키스하면서도 범인은 놓치지 않는 센스!), 결국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연하의 잘생긴 재벌 2세 ‘삼식이’를 어르고 달래서 조금씩 괜찮은 남자로 만들어 간다.

이는 곧 선아물의 소비 대상이 점점 여성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가 <색즉시공>과 <몽정기>등 그 당시 인기 있었던 남성 중심의 섹스 코미디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면, <S 다이어리>와 <잠복근무>는 관객의 타깃을 ‘선아 언니’를 좋아하는 여성들에게 맞추었으며, <내 이름은 김삼순>은 여성 시청자들이 인기를 좌우하는 TV 드라마였다. 그래서 김선아의 상대역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업그레이드 됐지만, 그것은 과거의 신데렐라 캐릭터처럼 무조건 멋진 남자를 만나 끌려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선아의 캐릭터는 현실의 공감대에 바탕을 두었고, 그래서 김선아의 남자들은 ‘멋진 남자’라는 설명만 있을 뿐 캐릭터 자체가 불분명한 <잠복근무>의 공유를 빼면 모두 단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김삼순>은 <S 다이어리>에서 그나마 ‘그래도 그때는 진심이었음’을 사족처럼 덧붙였던 현실 속 남자의 모습을 ‘그 진심이 사실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음’이라고 폭로한다.

연애는 헨리가 아니라 삼식이하고 하는 거지

<내 이름은 김삼순>의 현빈이 독특해 보이는 이유는 거기서 비롯된다. TV 드라마는 평범한 여성들이 가장 많이 보는 매체이면서, 더불어 그들의 환상이 가장 잘 실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빈이 연기한 현진헌은 두 여자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지만, 드라마 초반에는 외적인 조건은 물론, 내적으로도 꽤나 성숙한 것처럼(유능한 사람을 하나 고용하기 위해 그가 보여주는 열성이나, 삼순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라) 보인다. 다른 김선아의 남자들이 그냥 그저 그런 현실의 남자를 연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면, 진헌은 판타지에 가까우면서도 현실적이고, 못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남성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빈은 결국 <내 이름은 김삼순>을 통해 차세대 거물이 될 가능성을 남겼다. 현빈의 연기는 대사처리 능력이나 발성보다는(그의 발성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발성은 의외로 또렷하다) 오히려 ‘표정’과 ‘뉘앙스’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그의 대사처리는 드라마 초반 ‘남자 다 거기서 거깁니다’를 말하던 때나, 삼순이 빼곤 세상에서 무서운 게 없다던 드라마 중반이나 큰 차이는 없다(이는 작가가 현빈에게 어울리는 어투로 대사를 맞춘 이유도 있겠지만. 진헌의 말투엔 <아일랜드>에서처럼 ‘~니다’나 ‘~요’처럼 끝이 차분하게 내려가는 대사가 은근히 많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의 감정 표현이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은 그가 코믹 연기를 할 때만큼은 의도적으로 연기의 톤을 달리 잡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평소 진지한 대사를 할 때의 어투와 김선아에게 응석부릴 때의 모습은 180도 다르다. 그건 마치 정극 드라마와 시트콤 <논스톱>을 볼 때의 차이 같은 것이지만, 그 과장된 톤은 오히려 작품 내에서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진헌의 캐릭터와 어울렸다. 그가 웃겨야할 씬에서 조금이라도 평이한 연기를 보였다면, 그것이야말로 진헌의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반감시켰을지도 모른다.

현빈의 표정과 뉘앙스는 코믹한 정극, 혹은 정극 같은 시트콤일 수도 있는 <내이름은 김삼순>의 간극을 메운다. 그는 드라마 초반 완벽한 재벌 2세지만, 희진이 돌아온 뒤에는 우유부단 삼식이가 된다. 그리고 그 전환점은 진헌이 삼순을 멀리 하면서도 삼순에게 ‘나만 봐’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취할 때다. 그때 그의 표정은 멋진 남자의 이미지를 지키려는 자신의 모습과, 어쩔 수 없는 ‘삼식스러운’ 모습이 결합되어 있다. 그가 이영이나 삼순에게 얻어맞을 때 짓는 표정을 보라. 그의 표정은 정말 ‘표정관리’가 안 돼 어찌할 바 모르는 ‘어른 같은 아이’의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지만, 사실 내면은 ‘삼식이’인지라 그럴 수 없다. 아프기도 아프고, 저런 ‘어른 여자’의 대응에 어찌할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건 눈을 조금 찡그리며 억울해하는 귀여운 표정을 짓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이 표정이 나오면서부터 진헌의 표정은 조금씩 다양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노래방에서 박봉숙 여사의 노래에 맞춰 눈을 감고 탬버린을 치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또 그가 삼순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며 ‘한번만’이라고 할 때의 그 오묘한 뉘앙스는 어떤가. 그의 어투는 그대로지만, 그는 말끝을 미묘하게 바꾸면서 딱딱한 그의 말투 속에 있던 아이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마스터 피스라든가, 절정에 올랐다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겠지만, 현빈은 <내 이름은 김삼순>의 캐릭터 그대로, 여성이 바라는 남자와 현실의 남자의 양면을 김선아의 파트너 중 가장 잘 소화했다.

삼순이는 여왕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현빈을 상대한 김선아의 연기는 평범한 여성 캐릭터의 마스터피스다. 현빈이 코미디와 정극의 간극을 ‘좁히는’ 수준이었다면, 김선아의 연기는 가끔씩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해야 할 때를 제외하면 코미디와 정극 자체의 구분을 의미 없게 만든다. 이런 저런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이, <내 이름은 김삼순>의 명장면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버지와의 술자리 씬을 기억해 보라. 그 씬에서 김선아는 처음엔 귀엽게 술주정하는 여성의 캐릭터를 보여주지만, 어느 순간 거기에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는 여자의 마음을 담아 하염없이 울기 시작한다.

김선아는 자신의 캐릭터가 웃기거나 진지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그 때마다 표정을 바꾸고 말투를 바꾸는 것 이상으로 그 감정선을 충실히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웃길 때는 가볍게, 슬플 때는 진지한 티를 내면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여자, 욕도 잘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도 틈틈이 읽는 여자가 웃을 때도 슬플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헌을 상대로 푼수도 됐다가, 다시 ‘살벌’할 정도의 눈빛으로 진헌을 몰아붙일 수도 있다. 진헌이 코믹한 삼식과 재벌 2세 진헌을 나눠서 보여줬다면, 김선아는 ‘삼순이’를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김선아가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전부터 영화계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놓은 김선아와 ‘선아물’의 힘 때문이다. 만약 다른 배우가 김선아와 똑같이 연기했다고 해도 김선아와 같은 반응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선아와 삼순이가 보여주는 캐릭터의 일체감은 단지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의 연기력 때문이 아니라,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여성들에게 어떤 대표성을 확보한 김선아만의 캐릭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선아의 ‘선아물’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물론, 김선아가 계속 30대 솔로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캐릭터로만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내 이름은 김선아>는 장르로서의 ‘선아물’의 절정이 될지도 모르고, 이와 비슷한 작품이 계속 이어지면 김선아도 언젠가는 자기 복제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의 김선아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젊은 신인 남자 배우를 상대로 해도 흥행을 이끌 수 있는 여배우이고, 더욱이 <내 이름은 김삼순>을 통해 코미디를 연기할 수 있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정극 연기력을 동시에 갖춘 배우로 인정받았다. 만약 김선아가 여기서 조금만 더 자신의 폭을 넓히면서 여성의 대표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남성 배우, 남성 제작자에 가려지지 않는 진짜 ‘원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김선아, 혹은 하지원, 혹은 문근영이 10년 후 <씨네 21>의 영화인 파워 순위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을지.

※이 기사는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님이 운영중인 트리플크라운에서 제공합니다. 기사는 DVD토픽과 트리플 크라운 두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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