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카우보이 비밥>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2005-08-18
글 : 한청남

역대 일본 TV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카우보이 비밥>이 전 시리즈 5.1채널 음향으로 다시 찾아왔다. 음향을 새롭게 업그레이드 시킨 것만으로도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뛰어난 영상에 못지않은 칸노 요코의 훌륭한 사운드트랙이 새롭게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또한 이번 <카우보이 비밥 5.1ch 박스>에는 지금까지 공개돼지 않았던 제작 뒷이야기가 담긴 스탭들의 코멘터리와 해설집이 포함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카우보이 비밥>은 이제껏 '제작비화를 밝히는 것을 촌스럽다는 듯이 거부해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팬들의 궁금증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DVD토픽에서는 미리 입수한 <카우보이 비밥 5.1ch 박스>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와 함께 영화, 음악 등 여러 대중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 독특한 애니메이션의 여러 면면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

제작에 난항을 겪었던 작품

지금은 성공한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는 <카우보이 비밥>이지만 제작 초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동전사 건담> <사이버 포뮬러> 등의 명작을 선보여온 일본의 선라이즈사가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 '성인 취향의 진지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야심차게 계획했으나 상업성을 중시하는 TV 방송국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당시 TV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던 상당수 아이들이 광과민성 발작을 일으켰던 '포켓 몬스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되는 시기라서 <카우보이 비밥>의 (성인의 눈높이에 맞춘) 폭력성은 더욱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렵사리 TV도쿄에 방영이 시작되지만 마약 흡입 장면이 나오는 1화 <소행성 블루스>를 비롯해 전체 26화 중 절반이 넘는 14화가 전파를 타지 못한다(TV 방영 화수는 13화로 되어 있지만 총집편을 제외하면 12화만 방송되었다). 그나마 방영이 이루어진 에피소드들도 방송국에 의해 임의로 편집되고 수정되었는데 이러한 수난은 2001년 카툰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에 방영될 당시에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하필 방영이 시작된 지 2주째 되던 시기에 9․11 사태가 벌어졌던 것. 때문에 당시 무역센터 빌딩의 붕괴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포함된 세 편의 에피소드(6, 8, 22화)는 방송 스케줄에서 아예 빠지게 된다.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 때문에 제작 초기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카우보이 비밥>이지만 연출을 맡은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집념 -그는 아이들용 완구를 홍보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라는 스폰서의 압력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우수한 스탭들의 노력으로 인해 명작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소룡에게 바치는 애니메이션

1화 <소행성 블루스>에서부터 현란한 무술 동작을 선보이는 주인공 스파이크. 군살 없는 체격에서 나오는 스피드와 정확한 타격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2화 <들개의 스트러트>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작품 속에 명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스파이크의 정신적 스승은 바로 이소룡이며 그가 사용하는 무술은 이소룡이 창안한 절권도다. 2화는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에피소드인데 우선 스파이크가 추격하는 현상범부터가 <사망유희>에 등장했던 장신의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배역명 하킴)를 패러디한 '압둘 하킴'이다. 또한 스파이크가 골동품점에서 쌍절곤을 보고 “맹룡과강 모델이군”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해설집에 따르면 와타나베 감독이 무척이나 신경 썼던 대사라고 하는데 별반 반응이 없어서 무척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8화 <비너스의 왈츠>에서는 스파이크가 자신의 제자가 된 로코에게 “물처럼 되어야한다”라는 말한다. 바로 <용쟁호투>에 나왔던 대사다.

이렇듯 <카우보이 비밥>에서는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한데 이는 역시나 와타나베 감독이 그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셔스의 마지막 대결에서 스파이크에게 쌍절곤을 들려줄 생각까지 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쌍절곤을 표현하기가 힘들어서 포기했다고. 팬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별난 내력의 조역들

<카우보이 비밥>에는 비밥호에 탄 네 명의 주인공들만큼이나 조역들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와타나베 감독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조역들 개개인에게도 나름의 개성과 내력을 부여하려고 밝힌 바 있는데 그러한 노력에 의해 작품의 재미는 더욱 배가되고 있다. 우선 주연 못지않게 자주 출연하는 캐릭터로는 단연 세 할아버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을 꼽을 수 있다. 화성 개척자 출신인 이들 할아버지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시리즈 곳곳에 등장해 익살맞은 행동으로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낸다(극장판에서는 그야말로 대활약을 펼치기까지 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들의 이름은 보사노바의 거장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이름에서 따왔다. 또한 SF적인 배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인디언 추장 '래핑 불'이나 제트의 오랜 친구이자 적당히 세상에 순응해가며 사는 경찰 '밥'도 비밥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캐릭터들이다.

한편 잠깐씩 등장하는 단역들도 각종 패러디와 사회풍자적인 설정들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찾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7화 <헤비메탈 퀸>에 등장하는 현상범 '데커'는 아주 작정하고 디자인한 듯이 배우 우디 알렌과 흡사하다. 9화 <재밍 위드 에드워드>에서 엉터리 연구가의 이름은 초능력자 유리 겔러를 패러디한 '유리 켈러맨'. 23화 <브레인 스크래치>에 나오는 닥터 론데스와 그의 종교집단은 1997년 집단자살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마샬 애플화이트의 '천국의 문'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 중에서 특히 22화 <카우보이 펑크>의 현상범 '테디바머'는 실제 우편폭탄 테러를 일으킨 '유나바머' 테드 카진스키를 모델로 하여 미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현실과는 달리 너무도 희극적인 캐릭터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카우보이 비밥>에 숨은그림찾기처럼 꼭꼭 숨어있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미국 대중문화의 인용이다. 안노 히데아키 같은 오타쿠 세대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주로 일본산 특촬영화나 자신들이 보고 자랐던 애니메이션을 인용해왔던 것이 비해 <카우보이 비밥>은 미국 쪽에 가깝다는 것이 이채롭다.

우선 <스타워즈>와 함께 인기 SF 시리즈로 군림하는 <스타트렉>의 팬들이라면 근사한 메카닉 액션이 펼쳐지는 19화 <야생마들>을 눈여겨 볼 것. 캐릭터들의 이름들이 범상치 않은데, 우선 스파이크의 기체를 수리하는 정비사 '두한'은 원조 <스타트렉> 시리즈의 기관장 스콧 역을 맡았던 배우 고 제임스 두한에서 따온 이름. 그 외 마일즈나 레지 등의 이름들도 <스타트렉>의 등장인물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세 현상범의 이름도 왠지 낯설지가 않다. 조지, 허먼, 루스라는 이들 세 명의 이름을 합치면 바로 전설적인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의 본명이 나온다. 이는 에피소드 내내 흘러나오는 야구 중계와 절묘한 매치를 이룬다.

앞의 내용들은 다소 마니악하지만 18화 <10년 후의 나에게>에서는 비교적 찾기 쉬운 인용이 눈에 띈다. 20세기 영상 마니아가 보고 있던 외화가 그것인데 흘러나오는 대사나 마지막 스탭롤을 통해 <비벌리힐즈의 아이들>임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리고 10화 <가니메데 비가> 초반에 잠깐 나오는 현상범의 이름은 베이커 폰초레로. 험상궂은 외모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지만, 실은 과거 '기동순찰대'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었던 외화 <CHiPs>의 두 주인공 이름을 합친 것이다. 여기에 결정타라면 아무래도 25화 <더 리얼 포크 블루스>에 나오는 제트의 대사를 꼽을 수 있겠다. 그가 인용하는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은 너무도 근사하게 들린다. <카우보이 비밥>이 지향하는 바가 서구 뮤지션들의 음악 세계를 바탕으로 한 무국적의 SF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본보다는 미국 대중문화의 인용이 더 적절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밥 속의 영화 오마주

재즈의 한 갈래인 비밥을 내세우면서도 헤비메탈, 락, 발라드 등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는 <카우보이 비밥>.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오마주된 영화들 역시 다양한 장르의 것들로 혼재되어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홍콩 느와르 영화. 스파이크와 비셔스의 숙명적인 대결은 비장미 넘치는 분위기와 우아한 총격 액션이 강조된 오우삼의 영화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5화 <타락천사의 발라드>의 후반부 성당 결투씬은 말할 것도 없이 <첩혈쌍웅>이며, 26화 <더 리얼 포크 블루스>에서 서로의 무기를 넘겨주는 장면은 <영웅본색 2>를 노골적으로 인용했다. 여기에 변종 홍콩 느와르라고 할 수 있는 <데스페라도>의 오마주도 존재한다. 바로 1화 <소행성 블루스>에 등장하는 술집이 그것인데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활약했던 장소를 그대로 그린 것에 로드리게즈 감독이 무척 반가워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고전 명작들에 대한 오마주도 영화팬들에겐 반가울 듯. 스페이스 트러커들의 모습을 그린 7화 <헤비메탈 퀸>는 원래 이브 몽탕 주연의 고전 서스펜스 영화 <공포의 보수>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에피소드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와타나베 감독이 일본의 원로 배우 스가와라 분타가 왕년에 출연했던 트럭 운전수 소재 영화들도 참고했기 때문. 한편 극 중 조역 캐릭터들의 이름은 폭력미학의 거장 셈 페킨파가 트럭 운전수들의 낭만을 그린 <콘보이>에서 따왔다고.

그리고 9화 <재밍 위드 에드워드>에 나오는 인공 지능 컴퓨터 '응퓨'가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HAL9000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SF 영화 팬들이라면 금방 알아차릴만한 부분이다. 17화 <머슈룸 삼바>에서는 70년대 흑인 액션 장르였던 '블랙익스플로이테이션'의 두 작품이 격돌한다. 생김새는 둘째 치고 조역 캐릭터들의 이름부터가 <코피>와 <샤프트>다. <카우보이 비밥> 이후 이 두 작품은 배우 팸 그리어의 부활과 새뮤얼 L. 잭슨 주연의 리메이크 영화로 다시금 각광받는다. 또 하나, 20화 <피에로의 진혼곡>의 영제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실험적인 예술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에서 따왔다. 제목 외에 별다른 유사점은 없지만 이 에피소드 역시 대사를 극도로 자제한 실험적인 면모가 보이기 때문에 고다르의 영화에서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나 음악

<카우보이 비밥>의 음악이 훌륭하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칸노 요코의 천재적인 감수성이 빚어낸 명곡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일등공신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사실 상업 애니메이션에 비주류 음악인 재즈를 사용하는 것부터가 큰 모험이었는데, 당초 제작진들은 음악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진짜 재즈' 보다는 샘플링 뮤직으로 때울 생각이었다고. 다행히 와타나베 감독의 전작 <마크로스 플러스>에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칸노 요코가 가세하면서 지금과 같은 명곡들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칸노 요코에게 음악 작곡을 자유롭게 일임한 대신, 칸노 요코 또한 자신의 음악 선곡을 제작진들에게 자유롭게 맡겼다는 사실. 제작진들은 칸노 요코가 작곡한 다양한 장르의 멋들어진 곡들에 감탄했고, 칸노 요코 역시 예상치 못한 훌륭한 선곡에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5화 <타락천사의 발라드>에 쓰인 'Green Bird'. 원래 칸노 요코는 '멸종해가는 바다쥐'를 위한 노래로 작곡했으나, 와타나베 감독은 곡에서 천사가 강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 아예 장면까지 곡 길이에 맞춰서 연출했다고 한다.

<보헤미안 랩소디>나 <마이 퍼니 발렌타인> 같은 각 에피소드들의 제목들부터가 거장들의 명곡들에서 따온 것이니 <카우보이 비밥>은 음악에 의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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