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사담으로 시작하는 것을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용서하시기를.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 나는 장진을 지난해 가을, 부산영화제에 가기 위해서 김해공항에서 차를 기다리면서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길다고 해봐야 김해공항에서 해운대 메가박스에 자리한 영화제 사무실까지 가는 40분 정도의 동행길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장진의 영화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기막힌 사내들>은 새롭기는 했지만 그만큼 나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영화는 뒤죽박죽이었고, 내 생각에 장진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 다음 <간첩 리철진>은 좀 나았다. 하지만 그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다른 사람이라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와 재치있는 상황을 만들 줄 알지만 영화는 어디선가 꼬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갑자기 혼란에 빠져들었다. <킬러들의 수다>는 그냥 보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그의 네 번째 영화 <아는 여자>를 본 다음 처음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뭐랄까, 갑자기 영화가 다른 수준으로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재영의 힘이 컸고, 거기에 ‘마치 외계에서 온 소녀’ 같은 이나영은 드물게 자기에게 맞는 인물을 만나서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는 여자>를 본 다음 그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때 장진의 다음 영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연극의 장점을 영화에서 살리려는 시도
장진은 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차라리 수줍게 말한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런데 지금 준비하는 다음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흥분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평담론들, 그중에서도 비평가들이 아니라 충무로의 영화감독들, 혹은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사람들은 내 영화를 연극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차라리 그 사람들이 연극을 아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나한테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혹시 보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무대 연출한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연극이 있는데 그걸 영화로 옮겨볼 생각입니다. 그것도 연극 무대처럼 만들어서 그 위에서 영화로 만들면 그게 연극적인 영화인지 영화적인 연극인지 질문할 생각입니다. 사실 그 연극은 무대에서 연출할 때 영화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미안하게도 나는 그 연극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제목은 알고 있었다. 장진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박수칠 때 떠나라>를 보러갔다. 이 영화는 장진의 가장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가장 야심적인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정말 자기 말 그대로 연극을 영화로 옮겼다. 이 말은 희곡을 영화로 각색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극의 틀은 그대로 남긴 채 그걸 영화로 옮긴 다음 다시 그 안에서 연극적인 시도를 한다. 그냥 더 간단하게. 장진은 연극과 영화 사이에서 오고간다. 장르 사이의 왕복, 이 제스처에서 저 액션으로, 저 동선에서 이 프레임으로, 연극이 요구하는 전체성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입체성으로, 그 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된 조건들. 그리고 오인받을 수밖에 없는 그 안에서의 왕복의 구별 불가능한 방법의 오류들. 장진이 여기서 그의 한계를 놓고 벌이는 게임은 흥미있지만, 그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영화에 오면 연극을 그리워한다. 그가 연극 무대를 연출할 때도 그럴까?
이야기는 간단하다. 5월20일 밤 11시40분, 호텔 1207호에서 미모의 카피라이터 정유정이 아홉 군데 칼에 찔린 채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그런 다음 검사 최연기(차승원)가 등장한다. 현장에서 용의자 김영훈(신하균)이 잡히고, 그에 대한 취조에 들어간다. 그걸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48시간 생방송 중계를 시작한다. 취지는 범죄예방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라이브 쇼일 뿐이다. 문제는 너무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이 사건이 의외로 꼬이기 시작한다.
사건보다 인물에 집중하는 하드보일드 추리물
취조실에서 이미 잡은 범인과 검사 사이에서 심리적인 대결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영화보다 연극이 잘할 수 있는 게임이다. 영화가 더 잘할 수 있는 게임은 그 범인을 잡으러 돌아다니는 일이다. 아마 장진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진은 자기가 세운 한계를 먼저 받아들인다. 아니, 차라리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다. 영화는 실내로 들어오고, 일단 들어오면 거기서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설정 자체가 장진의 게임이다. 두개의 게임. 검사와 범죄자의 심리적 게임, 그리고 장진의 영화와 연극의 게임. 물론 그 안에서 끝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 검사 최연기도, 용의자 김영훈도, 검찰청 직원들도, 방송국 프로그램 스탭들도, 물론 영화감독 장진도, 그리고 그가 이끌고 세트 안으로 들어온 그의 주력부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기자들도 아무도 끝나기 전에 나갈 수 없다.
(잠시! 여기서부터 스포일러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읽지 말거나, 보지 않을 분들만 읽으실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다음에는 나를 원망하지 말 것.)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이 아니다. 혹은 반 다인과 같은 추리라는 논리의 게임을 벌이지도 않는다(이를테면 마지막에 갑자기 무속신앙의 원귀와도 같은 덧없는 해결의 결말). 엘러리 퀸처럼 무시무시하지도 않다. 레이 브래드베리와 같은 반전의 유머도 없다. 최연기는 페리 메이슨이 아니며, 더더구나 브라운 신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금방 이 영화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었다. 그 대신 그걸 나는 장진의 메시지로 읽었다. 그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추리가 아니라 인물을 보아주길 기대한다. 그것도 연극적인 인물들의 제스처를 바라보는 영화적인 프레임과 카메라의 이동과 쉴새없는 편집을 보아달라고 요구한다. 같은 말이지만 연극과 영화를 보아달라고 간청한다. 이 희곡은 (내 생각에) 앤서니 세이퍼나 데이비드 마멧의 희곡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다. 하드보일드와 추리물에 적당히 걸쳐 선 이 영화는 사건 해결을 위해 촘촘하게 구성된 드라마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 대신 최연기 검사를 중심으로 인물들 사이의 거미줄을 따라간다. 그들이 던져진 취조실(이자 방마다 중계방송되고 있는 공개 무대)인 방과 방의 연속은 일종의 거미줄처럼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진 (카메라들이 감시하는) 투명한 아케이드이고, 그 안에서 영화는 마치 무대처럼 방과 방을 옮겨가면서 진행된다. 투명함, 하지만 탈출 불가능. 거미줄처럼 칭칭 동여맨 줄거리.
그런데 어리둥절한 것은 그 커다란 세트에, 그 안에 불려온 그 많은 인물과 그 인물들을 따라다닌 분주한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이 모든 노력을 그냥 허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만일 사건을 추궁하는 영화라면 추리로 풀어내든지 아니면 (검사가) 머리가 나쁘다면 완력으로 풀어내든지 해야만 했을 것이다(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을 위해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관객 자신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의 누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은 그냥 허위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 사건이 왜 풀리지 않는가, 라는 해결의 불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의 가장 이상한 점은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 시작된다. 이 영화는 왜 48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이 시간은 영화에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추리의 시간이 아니라 죽은 시체 정유정을 시체 부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영화는 물론 시체 부검하는 정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행된 추리의 논리를 모순으로 만드는 것은 마지막에 도착한 단 한장의 팩스, 그러니까 이 사건이 결국에는 정유정의 자살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내내 본 것은 누가 죽였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를 누가 훼손시켰는가, 라는 다소 역겨운 시체와의 숨바꼭질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알게 된다. 이것은 왜상효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두개의 위치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이중의 잉여지식의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한쪽을 알면 다른 한쪽은 무의미해지는 진위 판단의 진술이다. 물론 장진이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중간에 죽은 정유정의 유령이 찾아와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쓰는 최연기 검사에게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선물한 다음 떠나가는 장면을 포함시켰다. 영화는 죽은 정유정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저 커피 한잔 주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죽은 정유정 역의 김지수의 ‘사소한’ 등장은 지나치게 인상적이어서 누구라도 의심을 품을 만하다.
장진은 마지막 순간 연극에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이것이 장진의 이중의 게임으로 읽힌다. 지나칠 정도로 무대와도 같은 세트 안에서 영화적인 프레임과 카메라의 이동과 쉴새없는 편집을 동원한 이 영화에서 정유정의 유령이 최연기 검사 곁에 등장하는 장면은 신기하게도 연극적으로 찍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김지수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다른 장면과 다르게 찍혔기 때문에 인상에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연극이 영화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던 표현주의 영화 시대, 혹은 알프 쉐베르그 이후의 스웨덴영화의 전통, 그리고 물론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이후 보여진 영화의 연극적인 무대화,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필름 다르의 유산, 그 이후 반복되어온 영화 안의 연극의 자리를 재빨리 복원시키려는 방법의 반복이다. 영화가 죽은 자를, 유령을, 귀신을, 망령을, 특수효과 없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 있는 자 곁에 앉힐 때 그것을 성립시키는 영화적 전제는 연극적 유산의 인정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근본적으로 현실의 기계적 복제의 이미지에 물리적 운동을 부여하면서 시작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의심은 이 영화의 마지막, 그러니까 최연기 검사가 모두 다 떠난 거대한 세트와도 같은 취조실 스튜디오에서 저 한쪽 방문을 열자 마치 다시 한번 연극처럼 재현되는 정유정의 자살장면의 광경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확신이 되었다. 장진이 사건의 진실, 죽은 자의 진심, 비밀의 재현을 시도할 때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기만, 소란스러운 속임수, 재미있는 버라이어티 쇼, 스펙터클한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을, 혹은 진심을 보지 못한다. 그걸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극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 연극에로 고개를 돌린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장진의 첫사랑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더 좋아졌으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