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쿵푸 허슬>에 그려진 김용의 작품세계
2005-09-12
글 : 한청남

지난해 동남아에 지진해일이 강타했을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푸껫섬에서 조난의 위기를 겪었던 중국 무협소설계의 거두 김용(金庸)이 피해지역에 기부금을 전달했다는 소식인데, 그 기부금이 실은 주성치가 <쿵푸 허슬>에 인용한 김용 저작물에 대해 지불한 판권 사용료였다는 것이다.

무협소설의 거두 김용 선생

<사조영웅전> <소호강호>와 같은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신필’ 김용과 희극배우 주성치는 위와 같은 일화로도 알 수 있듯이 무척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주성치가 이소룡만큼이나 존경하는 김용의 작품세계가 주성치 코미디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쿵푸 허슬>에 녹아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 <녹정기>에서 야비한 위소보 역을 맡았으며 <식신>에서 ‘신조협려’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했던 주성치는 <쿵푸 허슬>에 이르러서는 김용의 작품에 아낌없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쿵푸 허슬>에 관련되어 소개된 다양한 흥미요소들 중 김용에 대한 내용들은 상대적으로 무시되다시피 했다. 이는 ‘화운사신’을 ‘야수(Beast)’로 번역하는 등 영어 대본을 토대로 만들어진 극장 자막이 그러한 인용들을 충실히 옮겨오지 못한 탓이 크다. 무협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반가워할 부분이 제대로 소개되지 알려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제작 뒷이야기 등 여러 부록을 담은 <쿵푸 허슬 UE>가 출시됨에 따라 영화 제작에 관한 비화를 보다 상세히 알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영화 속에 등장하는 김용의 작품세계와 그 외 중국 무협소설들에서 차용한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했다.

웬 파리스와 헬레네?

중국인들을 포함해 중국어를 아는 사람에게는 가장 코믹한 대사였지만 한편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는 다소 황당했던 대사가 있다. 바로 돼지촌 주인댁 부부가 화운사신에게 자신들이 “파리스와 헬레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개봉 당시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가 전 세계로 배급된 상황에서 그를 인용한 나름의 재치 있는 의역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김용 팬들 입장에서는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원래의 돼지촌 부부의 대사는 김용 소설에서 가장 완벽한 커플이었던 “양과(楊過)와 소용녀(小龍女)”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

양과와 소용녀는 “10억 인구를 울렸다”고 일컬어지는 무협 로맨스 <신조협려>의 두 주인공이다(국내에서는 ‘영웅문 2부’로 소개). 양과의 경우 뛰어난 두뇌와 수려한 외모로 소설 속 미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으며, 소용녀 역시 청초한 자태의 절세미녀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매우 불친절한 외모를 지닌 돼지촌 부부가 언급하기에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용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조협려>는 1959년 처음 연재 이래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인기를 토대로 수많은 TV 시리즈와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홍콩의 대표스타로 군림하는 장국영, 유덕화 등도 <신조협려>의 양과 역으로 유명세를 떨친 바 있기 때문에 영화 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내용일 것이다.

자객들의 음공과 주인댁 아줌마의 사자후

무협소설 팬이나 혹은 임청하 주연의 <육지금마> 같은 영화를 보아온 사람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지만 <쿵푸 허슬>에 등장하는 자객들의 고금파동권(古琴波動拳)은 일반적인 쿵푸 영화들에서는 보기 힘든 신기(神技)의 무술이다. 거문고 소리에 내공을 실어 공격하는 이들의 음공(音功) 기술은 영화의 스케일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데, 이소룡 영화 같은 권격물에서 초인들이 격돌하는 무협 판타지 영화로 이끄는 구실을 한다.

돼지촌의 숨은 고수들이 차례로 쓰러지는 가운데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돼지촌의 주인장 아줌마는 가공할 내력으로 사자후(獅子吼)를 내뿜는다. 소리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소리이기 때문. 이렇듯 소리를 통한 고수들의 싸움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영웅문 1부)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는 피리의 음색으로 적을 공격하는 고수 황약사가 등장하고 그의 라이벌인 구양봉은 가야금을, 개방의 수장 홍칠공은 휘파람으로 상대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결투는 순수한 내공의 싸움이기 때문에 육체의 격돌보다도 더욱 치명적이라고 묘사된다.

원래 부처님의 위엄스런 설법을 뜻하는 사자후는 역시 김용의 소설 <의천도룡기>(영웅문 3부)에 등장하는데, 주인공 장무기의 양아버지 금모사왕 사손이 한 번의 고함으로 무술의 달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폐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연걸 주연의 동명 영화에서는 아쉽게도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주성치는 왜 갑자기 고수가 되었나?

영화 후반부에서 화운사신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음에 이르렀던 주성치는 갑작스레 절세의 고수로 탈바꿈한다. 무지막지한 공격이 되레 전신의 경맥을 뚫어 잠재된 힘을 얻게 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내용 같지만 무협소설이나 영화에서는 클리셰처럼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임청하 주연의 <동방불패>로 유명한 소설 <소오강호>다.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은 온몸의 맥이 끊기고 맹독을 주입 당하는 등 전신의 내공을 잃은 상태에서 뜻밖의 기회를 통해 최고의 검객이 된다. 만약 정상적인 방법으로 수행했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주인공이 기연(奇緣)을 만나 고수가 되는 것은 무협 장르에서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며, 영화 속 뱀에 물렸던 주성치가 무의식적으로 괴력을 발휘한 것은 그에 대한 복선이라 할 수 있다.

돼지촌 주인댁 부부의 아들이 혹시 주성치?

영화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의사 혹은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주성치와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분명 의사나 변호사가 되었을 거라는 돼지촌 주인댁 아저씨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이 죽었다고 하지만 연령대로 보아 둘은 부자지간처럼 보인다. 이러한 만남은 흡사 김용이 이태백의 시를 모티브로 쓴 소설 <협객행>을 연상케 한다.

<협객행>에서 원수에 의해 쌍둥이 아들 중 한명을 빼앗긴 석청과 민유 부부는 남은 아들과 쏙 빼닮은 석파천을 만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점들로 인해 친자식임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못 배우고 자라 글자도 읽을 줄 모르던 석파천은 기연을 만나면서 천하의 고수로 성장해가고 그의 출생의 비밀 또한 밝혀지게 된다. <사조영웅전>만큼 국내에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기이한 운명에 관한 김용의 필력이 돋보이는 소설로서 이 역시 TV 시리즈로 영상화되었다. <의천도룡기> <녹정기> 등에 출연하면서 한때는 무협스타로 불렸던 양조위가 1인2역을 맡아 화제가 된 바 있다.

장국영이 합마공을 펼쳤다면?

고수가 된 주성치의 공격에 맥을 못 추던 화운사신이 갑자기 엎드려 두꺼비 행세를 한다. 턱을 볼록하게 만들고 소리까지 흉내를 내더니만 엄청난 기세로 주성치에게 돌격한다. 돼지촌 주인장의 설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비장의 기술은 바로 합마공(蛤摩功). 바로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과 그 후속편 <신조협려>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구양봉의 필살기다.

서독(西毒)이라 불리는 구양봉이 직접 창안한 이 기술은 강대한 위력으로 뭇 고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기술. 하지만 <쿵푸 허슬>이 나오기 이전까지 영상화된 모습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는데, 두꺼비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무술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였다. 대표적인 예로 양조위가 망가진 모습을 불사한 컬트 괴작 <동성서취>가 있으며, 주성치의 <식신>에서는 악당 당우가 자신의 뱃살을 내밀며 ‘합마공’이라 외친다(참고로 이 때 주성치가 선보인 기술은 <신조협려>에 나오는 암연소혼장의 패러디 ‘암연소혼반’).

한편 서독(西毒) 구양봉과 동사(東邪) 황약사의 젊은 날을 다룬 것으로 여겨지는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에서는 구양봉 역을 故 장국영이 연기했다. 만약 그가 영화 속에서 합마공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거지가 들고 있던 무공 비급들

영화 엔딩에서 주성치 이후 새로운 인재 발굴에 나선 수수께끼의 거지가 꼬마에게 내민 책자들은 하나 같이 절세의 무공 비급들이다. 무협소설식으로 얘기하자면 ‘한 권이라도 무림에 공개될 경우 파란을 불러올만한’ 책자들인 것이다. 특히 다섯 권의 책 중 한 권(천수신권)을 제외하면 모두 김용의 소설들에 나오는 무술들인데, 그 내용이 어떤 것들인지는 소설을 읽어본 사람만이 잘 알 것이다.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자.

독고구검(獨孤九劍)

전설의 검객 독고구패가 만들어냈다는 검술. <신조협려>에서 양과가 익히는 기술이며,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이 화산파의 선배 풍청양에게서 전수받은 무적의 검술이다. 모든 검술의 정수를 담아 만들었기 때문에 특별한 초식이 없이 상대의 약점을 공략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주성치의 전작 <소림 축구>에도 언급된다는 사실. 영화 초반부, 소림사에 관한 주성치의 궤변을 듣고 있던 오맹달이 “독고구검은 (소림사가 아닌) 화산파의 검술이잖아!”라며 반박하는 대사가 나온다.

일양지(一陽指)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구양봉의 합마공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로 등장한다. 남제(南帝)라 불리는 일등대사(一燈大師)의 무공이다. 홍콩에서 만들어진 TV 시리즈에서는 손가락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구양신공(九陽神功)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최강의 내공심법. 전설의 달마대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익힌 주인공 장무기는 대적하는 자의 무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영화 <의천도룡기>에서 이연걸이 상대방의 무공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연상하면 될 듯.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사조영웅전> <천룡팔부>에 등장하는 기술. 거지들의 무리인 개방의 우두머리들에게 전해지는 무공이다. 남다른 의협심의 소유자 곽정의 독문기술로서 내공보다는 외부로 가하는 타격을 위주로 하는 외가무술이다.

김용 원작이 아닌 부분들 - ‘여래신장’과 ‘화운사신’

사라진 전설의 무술로서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주성치가 펼치는 엄청난 위력의 여래신장(如來神掌). 이는 김용이 아닌 대만 출신 무협소설 작가 유잔양의 소설 <여래신장>에 나오는 기술 이름이다. 국내에선 그리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지만 중화권에서의 인기는 상당해서, 영화나 TV 시리즈 등으로 만들어진 바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82년도 쇼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영화 <여래신장>에서 주인공에게 여래신장을 전해주는 인물의 이름이 바로 화운사신(火雲邪神)이라는 점. <쿵푸 허슬>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주성치에게 패한 화운사신이 여래신장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편 1994년에 제작된 <화룡풍운>라는 영화에서는 주연을 맡은 임청하가 화운사신이라는 이름의 여고수로 등장한다. 원작과는 전혀 딴판인 내용으로, 적과 사랑에 빠지는 역할이 다분히 <동방불패>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따온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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