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거칠마루>의 파이터들 [1] - 탄생비화
2005-09-13
글 : 문석
독립장편영화 <거칠마루>가 개봉되기까지

올해 초부터 충무로에서는 요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 무술 고수들이 실제 격투를 벌이는 것을 담은 영화가 있다’는 얘기가 그것. 이 괴이한 소문의 주인공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돼 입소문을 탔고,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좀더 많은 관객 앞에 선보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9월15일 정식으로 개봉하는 <거칠마루>다. 사실, 이 소문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진짜 무술인들이 출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속 ‘대결’은 준비된 설정에 따른 연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칠마루>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연기가 너무나 실감나 그런 소문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마치 UFO처럼 돌발적으로 솟아오른 이 독립장편영화의 험난하기 짝이 없는 제작과정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 영화에 출연한 실제 무술인들도 함께 만났다. 다만, K1 데뷔를 준비하느라 일본에 체류 중인 ‘무사시 66’의 유양래와 군 복무 중인 최진용을 만날 수 없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인터넷 사이트 ‘무림지존’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8명의 회원은 그 사이트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거칠마루’로부터 초청을 받고 캠핑카에 올라탄다. 거칠마루가 자신과 실제 대련을 벌이고 싶어하는 이들 중 고수급만을 강원도의 오지로 초청한 것이다. 하지만 거칠마루와 격돌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8명의 무술 고수들은 최고수라 여겨지는 거칠마루와 맞상대하기 위해 서로를 격파해야 한다.

<거칠마루>의 이야기는 실로 단순하지만, 영화의 울림마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한 8명의 대결 과정이 대부분인 이 영화에는 날것으로서의 긴박한 액션만이 아니라, 무술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거칠마루>는 보통 사람들과 동떨어진 세계에 사는 듯한 무술인들의 분투를 보여줄 뿐이지만, 이상하게도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의 육체와 내면을 반추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은 역설적이게도 아마추어 배우일 수밖에 없는 무술인들의 어색한 연기와 저예산의 거친 화면에서 비롯된다. 번듯하고 미끈한 상업영화에서 발견될 수 없는 펄펄 뛰는 에너지와 소박하지만 확고한 메시지가 가슴 언저리 어딘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건 제작비 3500만원으로 2주간 촬영을 했고, 그뒤 2년 반 만에 개봉하는 이 영화의 고난이 프레임 사이에 밴 탓인지도 모른다.

<인간극장>의 ‘무림일기’에서 출발

<거칠마루>의 이 험로역정 뒤에는 김진성 감독이 존재한다. 2002년에 장편 상업영화 <서프라이즈>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독특한 영화이력의 소유자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부처를 닮은 남자> <어디갔다왔니?> 등의 단편을 만들며 연출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여러 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단편 덕에 그는 전윤수 감독 등과 함께 2000년 강제규필름의 신인감독 발굴 프로그램에 ‘스카우트’된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고, 그는 이곳을 떠나게 된다. <거칠마루>가 김진성 감독과 첫 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다. 2001년 8월 방송된 KBS <인간극장>의 ‘무림일기-고수를 찾아서’편은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두명의 무술인이 자신을 단련하고 대련 상대를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과정을 그린 이 다큐멘터리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런 문명화된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니, 무슨 생각으로 저러나 궁금했다.” 그는 곧바로 담당 PD에 연락을 취해 주인공 중 한명을 소개받는다. 그때 만난 인물이 훗날 <거칠마루>에서 주인공이자 무술감독으로 활약하게 될 장태식이었다. 김진성 감독은 장태식을 통해 여러 분야의 무술인들을 만나면서 “실현하는 방식만 다를 뿐, 그들의 꿈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구나”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소재는 2002년 장편 데뷔작 <서프라이즈>를 만드느라 잠시 서랍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2003년 두달 준비 거쳐 13일 만에 촬영

2003년 1월의 어느 날,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신작에 대한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다. 그것은 이 영화의 결론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따라서 지면을 통해 밝힐 수는 없다). 일단 대강의 줄거리가 떠오르자 그의 머릿속에는 흰 눈밭에서 대결을 펼치는 고수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영화사 이곳저곳을 두드렸지만 그들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겨울이 지나가면 이 영화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세계가 금세 잊혀질까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노트에 메모하는 아이처럼, 그는 그 겨울이 가기 전 영화를 찍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나리오 작가인 아내 변원미씨 등 지인들의 힘을 빌려 3500만원을 조달한 것은 다음 수순이었다.

김진성 감독

실제 무술인을 출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였다. “배우가 무술을 익히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또 리얼한 무술을 보여주려면 진짜 달인들이 필요했다.” 이미 주인공으로 내정됐던 ‘청바지’ 역의 장태식을 제외한 7명을 캐스팅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각 캐릭터의 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품고 있던 김진성 감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무술인을 영입한다. 이렇게 모인 배우들이 장태식, 권민기, 오미정, 유지훈, 김진명, 유양래였다. 여기에 몸놀림이 좋은 프로 배우 성홍일을 영입해 무술인들에게 부족한 연기를 보완하도록 했다. 이들은 장태식의 지도 아래 2월 초부터 한달간 맹훈련에 돌입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10번의 대결은 매일같이 진행된 철저한 연습을 통해 한층 리얼해졌다.

‘용감한 소년’이라는 뜻의 신라시대 말 ‘거친마루’를 변형한 제목 ‘거칠마루’도 이때 결정됐다. “‘거칠다’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마루’의 결합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싸움의 달인’이란 의미도 가질 수 있다.” 또 아내 변원미씨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거칠마루가 누굴까’라는 미스터리 구조와 이들을 방해하는 공권력의 존재 등 영화적 장치도 만들었다. 또 각 대결을 특색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펼친다는, <사망유희> 또는 ‘스트리트 파이터’식 구도 또한 이 단계에서 구상됐다. 하지만 촬영 예정지인 강원도로 사전 헌팅을 가는 계획은 좌절됐다. 갑자기 강원도에 눈이 쏟아져 길이란 길이 다 막혔기 때문이다. 결국 촬영기간 동안 조감독과 그는 촬영이 끝난 뒤 밤 시간과 새벽을 이용해 강원도 이곳저곳을 누비며 장소를 헌팅했고, 섭외해야 했다.

촬영은 겨울의 끝자락인 3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각자의 일정과 날씨 탓에 그들에게 주어진 촬영기간은 단 2주, 정확히 13일이었다. 그나마 초반 6일은 트레일러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찍는 데 다 허비했다. “영화에 나오는 분량은 20% 정도밖에 안 되지만, 연기가 필요한 대목이라 오래 걸렸다. 무술엔 달인이어도 연기는 초보자들이었으니까.” 7일 동안 나머지 70∼80%를 찍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초반 6일에는 아침과 오후에 무술장면을 하나씩 찍었고, 마지막 날에는 그것도 모자라 3신을 찍어야 했다. 가장 힘을 줘야 할 최후의 결승장면을 마지막 날 저녁 때 촬영한 것은 김진성 감독에게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그나마 디지털카메라 3대를 동시에 돌린 것은 이런 촉박한 일정에 대한 타개책이었다. “어차피 빨리 찍고 편집에서 승부를 내겠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무술장면은 영화와 리얼타임으로 진행됐다. 컷을 나눠 찍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투자자 못 찾아 후반작업만 2년

촬영이 끝났건만, <거칠마루>는 좀처럼 완성을 향해 발걸음을 뻗지 못했다. 김진성 감독은 이 영화에만 진득하게 매달릴 수 없었다. 후반작업을 위한 투자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서라도 다른 작품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 작품을 준비하고 엎어지고 하는 나날이 반복되던 와중에 그가 우연히 쓴 애니메이션 시나리오가 공모전에 당선됐다. 여유자금이 생긴 그는 <거칠마루>를 마무리짓기로 마음먹고 2004년 초 내내 아쉬웠던 마지막 장면을 새로 찍었고, 다시 6개월에 걸쳐 후반작업을 끝마쳤다. 이 완성본은 결국 지난해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특별상영되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들은 스폰지의 조성규 이사는 “김C에게 내레이션을 시키고 그의 밴드 ‘뜨거운 감자’에 음악을 맡기는 조건”을 걸고 투자를 결정했다. 이 투자를 바탕으로 김진성 감독은 그래도 미진했던 마지막 장면을 세 번째로 촬영했고 후반작업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2년 반 만에 마침내 <거칠마루> 극장판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런데, 김진성 감독도 영화 속 태식처럼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중한 뭔가를 얻었을까. “우선 영화 한편을 얻었고,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됐다. 무술영화를 찍을 수 있는 공부도 하게 됐다. <서프라이즈> 때의 미진함 같은 것을 살풀이한 느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가 얻은 결실은 우선 차기작인 <도장을 열어라>로 발휘될 것이다. “<거칠마루>를 하면서 진정한 한국 무술이 뭘까를 고민하게 됐다. 이를 영화를 통해 풀어보려 한다.” 결국, <거칠마루>에서 고수로 성장한 것은 태식을 비롯한 영화 속 무술인만이 아니다. 이 영화와 2년 반 동안 사투를 벌이며 정면 대결한 김진성 감독이야말로 진짜 고수, 또는 거칠마루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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