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거칠마루>의 파이터들 [3] - 6인의 무술인 ②
2005-09-13
글 : 이영진
글 : 문석
글 : 이종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여자 앞에선 숙맥이에요. 영화가 도움이 되었으면”

마시마로 역의 김진명

아마 영화 속 고수들 가운데 가장 귀여운 캐릭터는 마시마로일 것이다. 태식과 산길에서 강도 높고 박진감 있는 싸움장면을 보여주지만, 후반부에 깜찍하게 보여주는 재롱이 잊혀지지 않는 배우다. 촬영 뒤 2년 반이 지난 그의 몸은 무척 날렵하다. 공익 근무요원으로 들어가기 전 훈련소에서 자연스레 다이어트가 된 덕분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무려 156kg, 촬영 때는 130kg에 달했던 몸매는 190cm, 105kg로 줄어들었다. 주전공이 씨름이다보니 한창 때는 24시간 내내 먹기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장태식이 이소룡 키드라면 김진명은 성룡 키드라고 부를 만하다. 성룡의 영화는 몇번을 보고 또 봐도 즐겁다. 그러나 무술배우를 하겠다는 꿈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용인대학 격기학과를 다니던 중 원래 제안을 받았던 선배가 자신을 추천하는 바람에 ‘추억도 만들 겸’ 덜컥 배우가 되기로 했다. 유도선수 역할이지만 영화에서 사용한 주기술은 씨름이다. 배우들마다 눈밭에서 추위와 싸운 기억을 떠올리지만 그는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없었고 연기가 힘들었다고 말한다.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이다. “거울 보고 하면 안 이상한데 카메라만 보면 이상해져요. 영화 보면서 내 연기가 너무 어색해 계속 웃음만 나왔어요.”

눈도 제대로 깔리지 않은 얼어붙은 산길에서 싸움장면은 쉽지 않았지만, 당일 촬영이 끝나면 ‘형들과 술 한잔’ 마시는 즐거움이 한 자락 추억이 되었다. 영화에서 함께 붙어봤으면 했던 이가 누구냐고 하니 ‘모히칸’ 권민기를 꼽는다. “빠르잖아요. 한번 잡아보고 싶죠.”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영화 출연에 함께 기뻐해주었지만 아직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걱정을 끼쳐드릴까봐 강원도 촬영일정을 합숙훈련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학교 마치고 공익요원으로 일하는, 위로 누나만 셋인 막내아들이 무림고수로 영화에 나온다면 이보다 더한 깜짝쇼는 없을 터이다.

스타도 없는 영화가 과연 상영관에 걸릴지 불안했지만, 적어도 액션의 사실성만큼은 어떤 다른 액션영화보다 낫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의 작은 욕심은 영화가 상영관에 걸리고 그래서 여자친구를 한번 사귀어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여자 앞에서만 서면 숙맥이에요. 한번도 못 사귀어봤는데 영화가 꼭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모> 보고 무술을 응용할 수 있겠다 싶었죠”

철사장 역의 오미정

“작고 귀엽다고 만만하게 보다간 큰코다쳐요.” 사진촬영을 하다 말고 누군가 한마디 툭 던지는데, 대답은 없어도 다들 수긍하는 표정이다. 거칠마루에 오르기 위해 철사장을 내뿜는 오미정은 다른 배우들보다 무림입문이 늦은 편. 태어나자마자 걸린 폐렴 후유증 때문이었는지, 유년 시절 그녀는 언제나 콜록거렸고 열이 오르면 새빨간 코피까지 쏟았다.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이었지만, 골골한 그녀는 도장 출입금지 신세였다고. “태권도를 배우던 언니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갈망은 지워도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1997년 제주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친구따라 학내 우슈 동아리가 연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첫눈에 반했어요. 시각적 쾌감이라고 해야 하나.” 2001년 8월 본격적으로 입권한 그녀는 “남자 수련생에게도 질 수 없다”는 승부욕을 밑천 삼아 남들보다 배로 연습했다.

늦게 타오른 불길은 거침없었다. “일어 전공하고서 왜 중국에 가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어 한마디 못하는” 그녀는 2003년 중국 산시무술학원으로 수련을 떠난다. 국내 우슈대회에서 수상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처음엔 꽤 마음고생을 했다. “열살짜리 애들보다 스피드나 힘이 떨어지는 거예요. 잘 못하니까 매번 맨 뒤에 서서 따라했어요. 앞에 선 아이가 넘어야 할 목표였죠.” 지치지 않는 근성 탓일까. 3개월 만에 도장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그녀는 “1m 뛰는 벌레도 작은 상자 안에 가뒀다가 꺼내놓으면 그만큼 못 뛰어요. 반대로 보는 눈이 높아지니 실력도 늘던데요” 한다.

중국에서 돌아와 곧바로 <거칠마루> 오디션에 흔쾌히 응했던 건 사부의 권유도 있었지만, 8할은 <다모> 때문이다. “여자 스턴트라고 해봤자 뛰어내리고 구르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다모>를 보고서 제 무술을 응용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합(合)을 짜본 적이 없어서 촬영에 들어가선 “오빠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그녀는 “눈 녹기 전에 촬영을 끝내야 해서 사전에 손발을 충분히 맞추지 못한 게 아쉽다”고. “표현 무술인 우슈”를 통해 자신감과 도전의지를 캐냈다는 그녀, 캐물으니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중국 수련 기간 중 덤으로 얻은 중국어 실력으로 현재 해양경찰 특채 시험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영화 일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고, 우슈 지도자 자격증도 따고 싶다고. 하긴, 그녀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

“고수들이 알아서 공격을 받아줘서 별 탈 없었다”

천장지구 역의 성홍일

성홍일은 <거칠마루>에서 튀는 존재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 천장지구는 세상의 온갖 무술을 섭렵한 대단한 스턴트맨이다, 라고 허풍을 떤다. 8명 중 가장 하수에 속하기에 실전에서는 연전연패하지만, 상대방을 치고 빠지는 입놀림만큼은 단연 최고수라 할 만하다. 하지만 성홍일이 이들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진짜 이유는 그만이 무술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본업은 연극배우. 고등학생 시절 극단에 들어간 이래 연기생활 17년째를 맞는, 이 대학로의 잔뼈 굵은 연기자가 무예의 달인들과 어깨를 맞대게 된 사정에는 우연이 큰 작용을 했다. 애초 김진성 감독이 필요로 했던 캐릭터는 태권도의 달인이었다. 극단 후배의 남편이 그 역할을 제안받은 상황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고사했고, 이 영화에 의욕을 느꼈던 성홍일이 대신 오디션에 임했다. “예전에 <대권무림>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공연 전체가 무술 그 자체였다. 그때 태권도, 복싱, 태껸 등을 익혔다.” 자연스레 쌓여 있던 그의 능숙한 무술 실력과 연기력은 김진성 감독을 만족시켰다.

그는 <거칠마루>에서 참기름 같은 지위를 소화했다. 시종 깐죽거리고 나불거리는 그의 고소한 연기 덕에 자칫 딱딱하기만 할 뻔했던 영화는 여유를 갖게 됐다. 또 성홍일은 뭔가 부자연스런 아마추어 배우들의 연기 사이에 기름칠을 해줬다. 초반 트레일러 내부장면에서 그는 대사의 대부분을 소화하며 캐릭터 사이를 소통시킨다. “시나리오에서는 전체 대사 중 내 분량이 70%였다.” 여기에 다른 7명에게 연기의 기본을 일러주기까지 했으니, 결국 그는 연기에 관한 한 영화 전체를 떠받치는 들보 역할을 한 셈이다.

무술고수들과 몸을 부대꼈지만, “고수들이 다 알아서 공격을 받아주는 덕에” 별 탈이 없었다는 그는 내레이션에서 천장지구가 ‘사기꾼’으로 분류된 것에 “사기꾼이라기보다 자기 무예에 과대망상을 갖고 있는 놈”이라며 자신의 캐릭터를 옹호한다. “너무 급박하게 촬영해 대결장면에서 떨리는 호흡 같은 디테일이 살지 못했다”며 배우다운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는 곧 <관객모독>으로 다시 무대를 누빌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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