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수첩을 뒤지다 우연히 생각지도 못한 메모를 발견했다. ‘고우영 완전정복’이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맡은 자의 처절한 몸부림에 하늘이 감읍한 탓이 아닐까. 이 메모는 2004년 9월2일 고우영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 직후 작성됐다. 왜 지금까지 이 전화 통화가 전혀 기억에 없었지는 모르겠지만, <일간스포츠> 창간 35주년 특집 인터뷰 스케줄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잠시 휘갈겨쓴 메모의 전문을 옮겨본다.
“35주년 특집 취재에 응해달라고 하자 (고우영 선생님은) 월요일날 다시 통화하자고 했다. 마감 때문에 대충 스케줄을 정해야 한다고 하니 그는 ‘나도 내 인생 정리해야 할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 평소 고 선생님답지 않게 그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암이 전신으로 퍼졌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그이다보면 그 가슴이 얼마나 저리겠는가. 아들 고성언씨는 ‘아버지를 아무도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결국 그를 만나지 못했고, 약간 서운한 감정으로 이 사건을 잊어버린 듯싶다. 수첩을 들춰보며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구나라는 후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 사건도 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될 것이다. 이제 그는 가고, 작품들만 남았다. 2000년 이후 복간을 통해 서점에서 쉽게 구해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10종. 아주 편리하게 전집 형태로 박스까지 있으니 소장해도 때깔이 난다.
“저의 현재는 고 선생님 덕입니다”
고 선생님의 만화를 얘기할 때 <하대리> <MLB 카툰>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젊은 만화가 최훈을 빼놓을 수 없다. <새소년> <소년중앙>을 보고 자란 세대로, 그는 아직도 고 선생님과 그의 작품에 대한 추억을 먹고산다. 글을 쓰고 있는 누구처럼. 불행히도 최훈은 그와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단다.
“<삼국지>는 진짜 추억이 많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떻게 봤냐고요? 사고를 당해 눈 수술을 받고 강남성모병원에 두달간 입원했어요. 눈 한쪽만 가리고 있는데 어린 것이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마침 병원 매점에서 얇고 판형이 큰 <삼국지> 전권을 팔았어요. 그게 <삼국지> 무삭제판이었고요. 물론 나중에 나온 <삼국지>에선 목 잘리고 여자 옷 벗은 건 다 잘렸지요. 아버지가 병원 매점에서 <삼국지>를 사와 퇴원할 때까지 몇번 돌려 읽었고, 그 덕에 금방 시간이 가서 쉽게 퇴원할 수 있었어요. 관우가 죽어서 조조에게 귀신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너무 무서워서 스카치테이프로 봉인을 해버렸지요. 그때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초한지>의 유방은 <삼국지>의 유비(몇몇 작품에서 고우영은 자신의 얼굴을 주인공의 것으로 설정해놓았다)와 얼굴이 똑같았죠. <초한지>를 보면서 유방이 재수없다고 생각했어요. 게으른데다 하는 것도 없는데 주변에 좋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만으로 천하통일 하잖아요. 만화가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죠. <가루지기> 땐 실망했어요. 한국 이야기인데다 싸움도 없어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어린 나이에 울렁울렁한 것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보면 변강쇠 캐릭터를 너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십팔사략>은 삼개월 동안 치과 다닐 때 비치가 되어 있어 다 읽었어요. 원래는 볼 마음이 없었어요. 그림이 크고 정밀하지도 않고. 손에 잡히니 <십팔사략>도 줄줄 읽히데요. 중간에 빠져 있는 권수가 있으면 열받아 하면서 말이지요. 내 작품은 고 선생님에게 영향을 무척 많이 받았어요. 특히 대사 처리하는 방법을. 풍선 밖에 낙서하듯 써놓은 조그만 글들이 재치와 위트가 있고. 대사 전개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써서 대단히 자연스럽지요. 비밀인데, <MLB 카툰>은 고 선생님의 방식을 차용하고 있어요.”
정작 작가 본인은 어떤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았을까. <임꺽정> <수호지> <일지매>, 세 작품이다. 내가 ‘도둑 삼부작’이라고 이름 붙인 세 작품은 작가 고우영에게 나름대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그에게 명성을 갖다준 첫 작품이자 출세작이고, <수호지>는 고우영 특유의 해학을 제대로 구사한 만화다. <일지매>는 순수 창작이 부족하다는 고우영 나름의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게 한 창작물이다. 세 작품은 작가 고우영의 대표작이면서 그의 클린업 트리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삼국지>를 빼놓았다고 분노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작가의 생각인 걸 어찌할까.
나는 가이드로서 좀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서비스의 시대, 와인 바의 소믈리에처럼 손님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정확히 내놓기로 결심했다.
고우영 고전의 기본 <임꺽정>
자신의 성격이 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임꺽정>(1972년 1월1일 <일간스포츠> 연재)부터 손에 잡는 것이 좋다. 고우영표 고전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연재 기간이 만 1년으로 비교적 짧지만 소수의 주인공에 초점을 맞춰 드라마적 재미를 온전히 담고 있다. 한 작품 안에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깔끔하면서 압축된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임꺽정>을 필두로 <일지매> <초한지> <가루지기>가 그런 스타일이다.
<일간스포츠>에서 소재를 던져준 <임꺽정>은 임꺽정, 서림, 남치근 등의 실존인물에 윤원형의 조카 윤원빈, 미모의 기생 춘심이라는 가상 인물을 등장시켰다. 오페라로 따지면 베르디의 <일 트라바토레>에 비유할 수 있을까. 화끈한 사나이들의 우정과 복수, 가슴 저미는 사랑 이야기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임꺽정, 윤원빈, 춘심이의 삼각관계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춘심이를 향한 임꺽정의 플라토닉 러브, 정인 윤원빈의 칼에 목을 내미는 춘심이, 세도가에서 태어나 세상의 욕망과 비정함의 먹이가 된 채 죽는 최고의 칼잡이 윤원빈. 김종래와 박기당과 같은 선배 만화가들의 삽화체를 연상시키는 그림체는 이 작품 깊이 스며 있는 인생의 허무와 비장미를 한껏 고조시킨다. <임꺽정> 뒤에 <수호지> <삼국지>를 보면 그의 작품이 어떤 궤적을 통해 발전해나갔는지를 알게 된다.
가장 대중적인 스타일 <수호지> <삼국지>
성격 급한 사람은 <수호지>와 <삼국지> 속으로 바로 다이빙해야 한다. 소재나 스타일 면에서 가장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각각 10권이니 분량도 가장 긴 편이다. 과일과 떡을 잔뜩 쌓아놓고 라면 한 사발까지 후후 불며 봐야 하는 작품들이다. 중국 고전 중에서도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원전과 고우영 버전을 비교하는 재미 역시 가장 크다. 그가 생계문제로 군 복무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시절, 끼고 달달 외우던 작품들이어서 해학적으로 풀어낸 폭도 가장 크다고 하겠다.
<임꺽정>의 후속으로 고우영을 197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만든 <수호지>는 역시 반금련과 무대의 이야기가 포인트. <일간스포츠>와의 불화로 연재가 중단되며 가장 심하게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삼국지>야말로 캐릭터 풀이에 묘미가 있다. 혹자는 유비를 ‘쪼다’로, 조조를 간웅으로 해석해낸 것을 지적하지만 진짜 매력남은 장비와 관우다. 장비야말로 무적의 장수이면서 체구에 걸맞지 않게 형들에게 애교를 부리는 의리의 남자. 고 선생님은 관우를 신장(神將)에 걸맞은 진중한 캐릭터로 표현해냈다. 장비의 코믹과 관우의 진중함이 유비를 축으로 묘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작가 고우영의 자존심 <일지매>
개인적으론 <일지매>와 <열국지>를 추천한다. <일지매>야말로 작가 고우영의 자존심이다. 고 선생님이 6·25 피난 시절 길바닥에서 파는 <일지매> 책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야심작이다. 작품의 완성도를 놓고 봐도 만점을 주고 싶을 정도다.
일지매를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야시시한 캐릭터로 설정했다는 점, 양포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등장시켜 막판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는 점, 일지매를 향한 월희의 집착, 일지매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옷고름을 푸는 여자를 사양하지 않는다는 점, 일지매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청나라 황제의 야욕을 저지하려 국경으로 떠난다는 열린 결말 등은 <일지매>만의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이다.
춘추전국 시대 열국(列國)의 흥망성쇠를 따라간 <열국지>야말로 저평가되어 있는 종목이라 할 수 있다. 소재가 춘추전국 시대일 뿐이지 실상은 춘추전국 시대를 산 영웅들의 이야기다. 550년 동안 170여개 국가가 뜨고 지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다 전하기보다는 걸출한 영웅이나 아주 지저분한 유명인사의 인생을 중심으로 깊이있게 그려나간다. 주나라를 망하게 한 포사를 시작으로 제환공, 진문공, 오자서, 오왕 부차, 월왕 구천, 귀곡 선생, 진시황 등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다양한 군상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꼬리를 물기 때문에 마지막 6권을 덮는 순간 ‘인생은 이런 거야’라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역사를 알려면 <십팔사략> <수레바퀴>
<열국지>를 탐독하고 <십팔사략>이나 <수레바퀴>를 대하면 마치 먼 곳에서 망원경을 대고 읽는 듯한 거리감이 생긴다. 중국 건국 신화부터 송나라 시대를 쭉 훑은 <십팔사략>이나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조선을 소개한 <수레바퀴>는 시대별로 휙휙 지나가 역사책 맛이 난다. <십팔사략>은 고 선생님이 중국 대륙 곳곳을 직접 발로 누빈 뒤 2년에 걸쳐 완성한 역작. 다이제스트로 방대한 역사를 압축한 것은 노년의 고우영이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래도 두 작품의 진정한 맛을 느끼려면 <열국지>는 나중에 읽는 게 좋겠다. 유방과 항우의 대결로 압축한 <초한지>는 드라마틱한 면에서 압권이지만, 최훈이 앞서 지적한 대로 매력은 다소 떨어진다. 진짜 주인공은 항우인데, 주인공이 결국 지고 죽어버리니 말이다. 주인공이 허무하게 죽는 영화치고 인기 있는 것 봤수?
성인만화의 결정판 <가루지기>
영화로 만들어진 <가루지기>는 성인극화의 결정판. 나는 <가루지기>에서 옹녀와 변강쇠를 자유인으로 읽어낸 고 선생님의 마음을 읽었다. “오죽 좋은가?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녹음방초 우거져 사방 주위가 싱그럽네”라는 강쇠의 말에 “좀 전에도 기랬시오”라는 용녀의 섹시한 사투리 좀 보라지. 아침에도 기운 솟는 남자 독자라면 옹녀의 눈꼬리 치는 웃음과 사투리가 며칠 동안은 눈앞의 잔상으로 어른거릴 게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 어문각의 클로버문고로 첫선을 보인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쥘 베른의 소설을 만화로 옮긴 것이다. 원래 고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만화를 하고 싶어했다. 이 작품은 그 결과물이다. 여기에 그의 아들 고성언씨가 컬러를 덧입혀 소장 가치를 높였다. 여기서도 고 선생님은 장난기를 발휘해 ‘누군가’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그려넣었으니 한번 보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