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속적인 욕망의 아이콘, 하지원 [2]
2005-09-20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친근하고 귀엽거나, 섹시하고 천박하거나

하지원이란 배우는 캐릭터를 통해서 만들어졌다. 지극한 성실함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가져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반면 그건 자신의 색깔이 강하지 않다는 뜻도 된다. <가위>의 음습한 이미지를 쉽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다모>에, <발리에서 생긴 일>에 하지원 아닌 다른 배우가 나와도 가능했을까? <다모>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모>는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고, 액션장면도 탁월하다. 하지원이란 배우는 아직 새로운 이미지를 체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모>의 후반부에 가면 하지원 아닌 채옥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진다. 마찬가지로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은 독보적이다. 수정은 천박하다. 발리에서 돌아와, 흰 털이 휘날리는 친구의 무대의상을 입고 재민의 회사로 가는 장면을 보자. 그건 수정의 캐릭터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정말로 억울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어버리는 수정을, 하지원 아닌 다른 배우가 했으면 어떨까? 그건 상상하기 힘들다. 이미 하지원은 <다모>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강인하면서도, 청순가련한 양면적인 모습을 갖춘 것이다. 하지원은 통속적이고 경박하지만, 우아하거나 내숭을 떨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얻는다. 재민이 수정에게 매력을 느낀 것은, 자신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솔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이 재민에게 끌린 것은, 자신처럼 재민이 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 양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배우는, 지금 하지원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원에게는 중의적인 매력이 있다. 친근하고 귀여우면서 청순가련하기도 하고, 가끔 섹시하기도 하다. 대중은 하지원에게서 그런 모순된 매력을 느낀다. 반면 어느 하나로만 간다면, 하지원 자신도 관객도 지쳐버린다. 어느 하나라면 하지원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배우들은 많이 있다. <역전에 산다> <키다리 아저씨>의 청순가련형이나 <내사랑 싸가지> <신부수업>의 말괄량이 이미지. 이 영화들의 하지원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캐릭터가 너무 단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원의 여러 이미지 중에서, 어느 하나만 빼낸다면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가 된다. 아직 하지원은 그 하나의 감정에 완벽하게 빠져들어 보석을 캐낼 수 있는 원숙한 배우가 아니다. 하지원은 그 모순적인 매력 때문에 사랑받고 있다.

<역전에 산다>
<내사랑 싸가지>

채옥이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그냥 안으로 삼켜요. 하지만 남순이는 표현하고 싶은 걸 다 표현해요. 채옥이는 종사관한테 표현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남순이는 먹던 거 막 던지고 술 붓고 하지만, 가슴속으로는 너무 사랑해라고 하잖아요. 감독님 말에 의하면 남순이는 또라이라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점은 너무 사랑한다는 거죠. 그렇게 한번 사랑해봤으면 좋겠어요.

채옥과 남순은 모두 방학기의 <다모>에서 나온 인물이다. 직업 말고 이름까지 달라진 채옥과 남순이지만, 그들은 같은 캐릭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에게 수많은 장점과 단점이 있고, 다양한 성질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채옥과 남순은, 원래의 캐릭터에서 어떤 점만을 끌어내 과장한 인물이다. 캐릭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채옥과 다모 모두를 한몸에 가진, 하지원이란 배우의 매력도 그것이다. <가위>의 음습함과 <오빠>의 섹시함과 <다모>의 눈물과 강인함, <발리에서 생긴 일>의 구질구질함과 청순함까지, 하지원은 모두 가지고 있다.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하지원은 그것들을 적절하게, 최상의 시간에 발견할 수 있었다.

<다모>와 똑같은 원작의 <형사 Duelist>를 하게 된 건 시나리오가 일단 너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사실 남순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애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일단 이명세 감독님을 믿고 가는 게 있었고, 그동안 <키다리 아저씨>나 <신부수업>이나 내 자신이 답답했다고 해야 하나요, 나를 뜯어내고 싶었어요. 연기를 하실 거예요, 스타를 하실 거예요, 라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고요. 이번 <형사…> 작업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울기도 했지만, 나에게서 오는 답답함 때문에 남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형사…>, 하지원의 우아한 착지

<형사 duelist>

<형사…>는 배우로서 하지원의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다모>로 시작된 도약이, <형사…>로 우아하게 내려앉았다고나 할까. <형사…>는 이미지로 말하는 영화다. 캐릭터의 변화나 감정도, 모두 몸짓과 액션으로 표현된다. 단 한번의 키스도 섹스도 없지만, 사실 남순과 슬픈눈은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늘진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결투는, 사랑의 밀어이자 손짓이고, 격정적인 애무이자 환희의 신음이다. 그 모든 것을, 몸으로 말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하지원은 몸짓과 액션으로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다모>와 <형사…>를 통하여, 하지원은 몸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배우가 된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형사…>는 하지원에게 대단히 의미심장한 영화다.

돌담길신 있죠. 그건 칼은 부딪히고 있지만, 마음속의 대사는,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예요. 당신은 뭘 좋아하세요, 둘이서 이런 얘기 나누는 거예요. 감독님은 베드신 찍는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지원아 이럴 때는 단추를 푸는 거야. 어느 공간에 가서는, 여기는 복도다. 여기는 침실이다. 그렇게 설명을 해주셨어요. 그냥 무술이 아니고, 내가 앞을 이렇게 하는 건 단추를 푸는 거, 잡아당기는 건 어디로 끌고 가는 거…. 감정에 무술을 실은 거라. 사실 현장에서 찍을 때는 좀 민망했어요. 키스도 할 수 없고, 포옹도 안 하고, 섹스하는 신도 없는 상황이라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관객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대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물이나 움직임이나 대사 하나하나에 감정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걸 표현하느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형사…> 이후 하지원은 어디로 갈까? 하지원의 행보는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안젤리나 졸리 같은 강인한 여성이 될까, 현재의 이미지를 착취하며 맴돌까. 어느 쪽인지 예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지원이 이룬 성공의 비밀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하지원의 지금을 결정한 것처럼, 이제부터 연기할 캐릭터가 하지원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원은 성실하게 새로운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배우다.

어떤 미래나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해보지만, 지금 이 순간 올인하는 스타일이에요. <형사…>를 했을 때도 그랬고, 또 다른 작품을 한다면 <형사…> 했을 때보다는 더 열심히 하고 올인을 해야겠죠. 내가 눈물 흘릴 때 관객이 같이 울어줬으면 좋겠고, 내가 웃을 때는 관객도 같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내 관심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배우? 거짓말 안 하는 배우? 그런 배우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장소협찬 A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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