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랑니>, 정지우의 도약 [3] - 정지우 감독 인터뷰 ②
2005-10-04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배우를 관찰하면 사람마다 써야 할 도구가 다르다”

-허문영/김정은에 대해 “이 배우다” 하는 확신이 들었던 시점이 어떤 시점인가.

=정지우/김정은을 처음 만난 것이 <파리의 연인> 직후였는데, 아마 칭찬받으며 자기 복제를 계속하려는 유혹과, 벗어나려는 욕구가 뒤섞인 시기였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해 내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했고 대화가 통했다. 영화 만들며 최악의 순간은 이 배우가 뭘 해도 이 선을 넘어설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건 정말 감독으로서 “X됐다”고 느끼는 상황이다. 배우를 120% 기다린다는 것은 내 의지 문제가 아니라 배우에게 그 역량이 잠재돼 있을 때 고집할 수 있는 것이다. 도저히 배우가 안 되면, 그 배우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대사를 줄이거나 상황을 단순화하며, 말하자면 영화적으로 붕괴가 안 되는 미봉책을 찾게 된다. 그러기 시작하면 현장 가는 것이 지옥이다. 나로선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단역 경우에만 있었고 이번에도 단역 한분을 결국 교체했다.

-김혜리/감독 본인이 연극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다. 모교인 한양대 최형인 교수도 “학교 때 뭐든 열심히 한 지우는 연기연출도 뛰어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김정은에게 칠판을 보냈다거나 전작 상대역의 연기를 시켰다거나, 두 배우를 방에 넣고 꼭 껴안고 있게 했다거나, 여러 일화를 들었다. 연기연출에 대한 소신이나 방법론이 있다면.

=정지우/연기연출의 비결이야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름을 많이 쓰는 거다. (웃음) 최형인 선생님에게 배워 잊지 않은 하나는 자세히 그 사람을 보는 일의 중요성이다. 배우를 관찰하면 사람마다 써야 할 도구가 다르다. 각자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말을 거는 수밖에 없다. 의외로 감독이 배우 얘기를 배우가 배우 얘기를 경청하지 않는 예가 많다. <내 남자의 로맨스>에서 상대역 대사를 읽게 한 것은 우선 지금부터 김정은이 하려는 역이 도전자가 아니라 챔피언이고 공주라는 점을 각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상대배우 연기가 놀랄 만큼 좋았다. 아마 상대역인 김정은의 힘도 컸을 것이다. 훌륭한 배우는 혼자서 다 따먹으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상대 연기를 자기가 받으니까. 연기 못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굉장히 집에서 성실하게 준비를 해오고 상대 배우 이야기를 안 듣는다. 집에서 환상적 계획을 세워 연습을 엄청 했으니, 상대가 A라고 쳐도 B라고 쳐도 똑같이 반응하는 거다. 배우에게 집중하는 내 방식에서는 배우가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촬영, 조명, 녹음이 다 맞춰주길 원하니까 스탭들이 힘들다.

-허문영/<사랑니>는 개별 숏 안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이 대단히 우아하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잘 못 찍은 영화는 그 움직임이 어딘지 서툰데, 그 차이란 미묘한 것이다. 배우의 동작을 끌어내기 위한 특별한 시도나 리허설이 있었나.

=정지우/사람의 말과 몸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절대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뭔가 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은 했다. 요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배우가 필요를 느껴 움직이는 것과 내가 몇몇 짧은 문장과 말로 인식시켜 동선을 내는 것은 매우 다르다. 그런데 동선에 대한 지시를 참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김혜리/17살 인영의 장면은 주로 들고 찍기로 촬영됐고 인물도 끊임없이 좌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것도 배우의 자연스런 움직임을 살리다 나온 결과인가.

=정지우/17살 인영 역을 맡은 배우(정유미)는 전혀 통제가 안 됐다. 마음대로 움직여 포커스 맞추기도 너무 힘들고, 들고 찍는 것이 그 사람을 찍을 수 있는- 익스트림 롱 숏- 을 제외하면 유일한 방법이었다. (웃음) 끝내 못 참고 “제발 여기서 해라” 한 적도 있는데 눈을 반짝이며 알았다고 해놓고 또 딴 데로 가는 거다. 한번은 촬영 도중에 카메라가 그녀를 따라갈 길을 즉석으로 내느라 나랑 촬영부랑 화환들을 들고 나른 일도 있었다. 차가 서기 전부터 문을 열고 내리는 신에서도 위험하니까 꼭 차가 선 다음에 문을 열라고 당부했는데도 미리 뒷문을 벌컥 열더니 굴러떨어졌다. 사고 난 줄 알고 모두 혼비백산했는데 또 벌떡 일어나더니 연기를 마저 하는 거다. (폭소) 나중에 그 친구가 “감독님 편집하시는 동안 저는 반성하겠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어쨌거나 편집할 때는 찍힌 모든 것이 진짜니 좋더라.

-허문영/<해피엔드>도 섬세한 장면이 있었지만 강렬한 사건이 개입하고 장르 관습에 의존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는데 <사랑니>에서는 인물들의 움직임 자체가 빚어내는 리듬이 실상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듯한 느낌이 있다. 이 영화에서 지켜내고자 한 핵심, 고집이 있었다면.

=정지우/서술의 시점이다. 몇개 어긋난 데가 있긴 하지만. 서른살/열일곱살 인영을 일인칭으로 대우하고, 기계적으로 인물이 공간에 있다는 느낌보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인물의 정서적 태도에 어울리게 장면화됐는가 편집됐는가 계속 검토하며 만들었다.

-김혜리/그리고 편집을 직접 했다. 처음부터 결심한 바였나.

=정지우/막말로 최종편집권을 안 줘도 좋고, 다른 편집기사와 경쟁을 시켜도 하겠다고 말했다. <해피엔드>를 만들며 편집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직접 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기능적인 흠이 있을 수도 있지만 현대영화에 와서는 편집의 기술적 요소가 점점 무시되는 추세라고 본다. 영화가 관습화되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편집을 맡기면 내 느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원하는 편집에 도착하기가 상당히 힘겹다. 또, 편집하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기 때문에 딴 사람 설득하면서 보내기 싫었다.

“구조의 힘으로 두 시간대를 대비시키려 했다”

-허문영/<사랑니>에서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 누가 봐도 트릭 혹은 트릭적으로 보이는 구성이 전반부에 나오고 중반부로 넘어가며 그 매듭이 회상이 아닌 또 다른 어린 인영의 이야기로 풀린다. 그런데 서른살 인영을 잡는 카메라는 그녀의 현실적 시간을 찍는데, 어린 인영의 이야기는 시간 범위가 그보다 길고 많은 사건을 포함하기 때문에 두 시간의 밀도가 불균질하고 비대칭이다.

=정지우/정확한 지적이다. 연출적 목표는 이랬다. 객관적 시간이 1분에 60초라면, 과거는 1분이 240초로 돌아가는 시간으로 정하고, 구조의 힘으로 두 시간대를 대비시키면서 내러티브의 질감을 달리 가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과거의 시간이 더 길게 걸쳐 있고 현재의 시간은 짧은데 두개의 시간이 중간에서 만나서 겹친 거다. 초침의 속도가 다른 시계를 가진 두 세계가 평행편집으로 흘러가다가 어떻게 만나고 다시 따로 흘러가는가에 관해 목표가 있었는데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영화가 완성됐다. 관객이 불편한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불편한 감각은 느낄 거다.

-김혜리/어린 인영이 탄 버스의 시계 그림도 그러한 의도의 표식이겠다. 인영, 이석, 정우를 연결하는 소품으로 하필 지구본을 택한 까닭은.

=정지우/지구본은 소년의 물건이며 미래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노인한테 지구본을 선물할 이유는 없다.

-김혜리/서른살 이석과 열일곱 이석, 정우와 인영이 한데 모이는 마당장면은 애드리브를 기초로 구축했다고 들었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갑자기 멈추어 선 듯하고, 여러 줄기의 이야기가 흘러들어 고인 저수지 같기도 하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정지우/그 장면에서 정리하고자 했다. 서양영화에는 이런 신이 많은데 한국영화에는 왜 없을까 생각해보니 우리에게는 주최쪽과 손님이 나뉘는 잔치는 있는데 파티가 없더라. 까딱하면 재수없어지는 장면이다. (웃음)

-허문영/영화를 본 일부 남자 기자들이 공간과 생활 스타일이 판타지적이라는 지적을 했다. 확실히 이 영화의 공간은 이상하다. 삼청동인데 서울 같지 않고 서울 근교 도시인데 거대한 역사가 있고. 인영과 이석이 첫날밤을 보내는 곳도 아는 사람이 보기엔 속리산인데 이튿날 태연히 이석이 학교 가겠다고 나선다. 예쁘게 찍기 위해서라기보다 공간이 지역적 특수성을 탈색하고 추상화돼 있다.

=정지우/공간 선택의 기준을 말하자면, 다시 시간 이야기로 돌아간다. 공간은 시간의 스펙트럼이 있는 공간과 한번에 지어올린 듯한 공간으로 구분된다. 이 영화는 주관적 심리상황이 전제돼 있으므로 객관적 공간의 사실성을 탈색했다. 장례식장 아닌 곳을 장례식장으로 쓰는 등 장소들의 용도도 어긋나게 썼다. 그렇게 주변의 일상성을 지움으로써 인물의 움직임과 동선을 도드라지게 만들려 했다. 아까 말한 대로 과거가 객관적 현실과 다른 시간 리듬을 갖는다면 그 공간은 인물이 16프레임으로 움직일 듯한 공간이길 바랐다. 사운드도 보조출연자를 쓰는 방식도 일반적인 사실주의 영화와 매우 다르다.

-허문영/심금을 울리는 대사도 많다. 그중 학원 영어강사 친구와 인영이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신은 올해 최고의 대화장면이 아닌가 싶다. 둘은 대화라기보다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각자 독백한다. 그러다가 인영이 “너 어젯밤에 비온 거 알아?” 하는데 나도 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잘 모르겠더라. 단지 전 장면에 카메라에 맺혔던 물기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래서 절묘하다는 감탄이 들었다. 이 영화는 많은 디테일을 촘촘히 깔아두고 관객에게 “당신이 보고 있는 영화를 세밀하게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정지우/그런 요청이 받아들여져 교감이 이뤄진다면 진짜 행복할 것 같다. 흥행은 둘째고 그런 교감에 실패한다면 무참할 것이다. 지지받건 그렇지 않건 관객과 대화가 되면 좋겠다.

-김혜리/어느 지점에서 영화를 끝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지금보다 앞에서(인영 집의 파티장면) 멈추는 버전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지금의 결론은 어떻게 내려졌나.

=정지우/내게는 자꾸 열려는 태도, 벌리고 닫지 않는 성향이 있다. 연출자들이 멋진 시도와 설정을 날려놓고 뒷감당을 안 하는 예가 많은데, <해피엔드> 이후 스스로 벌려놓은 것을 주워담는 일에 대해 좀더 유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래 성향이 있으니 끝까지 다 봐 주세요 하는 느낌은 여전하지만, <해피엔드>보다는 추스렸고, 뭔가 있는 척하면서 그냥 끝내는 단계는 넘어섰다. 아직 미흡하다고 보는 관객도 있겠지만 책임질 수 있는 발언까지는 하고 끝냈다.

-허문영/혹시 영화를 만들며 염두에 둔 텍스트가 있었나.

=정지우/전적으로 매혹된 것은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와 <아들>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이외의 요소에 지극히 무심한 영화였고 그 밖의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웅변하는 영화였다. 그 할아버지들의 믿어지지 않는 섬세함이란! <로제타> 마지막 장면은 영화 본 이튿날도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허문영/다르덴 형제 역시 수공업적인 영화, 이물질 없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다.

=정지우/당장은 어려워도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영화다. <사랑니>가 25억원이 들었는데 예산을 좀더 줄일 수 있다면, 그런 환경에 조금씩 가까이 더 근접할 수 있다면 더욱 순수하게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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