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멀티플렉스들 사이에서 재건축의 기로에 선 곽씨네하우스의 곽 회장은 중년의 배우지망생 오 여인을 남몰래 사모한다. 성격 고약한 곽 회장에게 문전박대당하는 외판원 창후는 사랑의 도피 끝에 아담한 가정을 이뤘지만 가난은 젊은 부부의 행복을 호시탐탐 노린다. 창후에게 신용카드 대금 독촉전화를 거는 퇴락한 전직 농구선수 성원은 게임을 통해 어린이돕기 성금을 모금하는 TV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8살 난 꼬마 진아를 만난다. 진아의 남자친구 지석의 부모는 사람도 사랑도 믿지 않는 냉혈한 사업가 조 사장과 씩씩하고 긍정적인 정신과 의사 유정. 조 사장은 세심한 청년 태현을 가정부로 맞이하고,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유정은 토론 프로그램에서 만난 중년의 숫총각 나 형사와 옥신각신하며 사랑을 키운다. 유정의 병동에 입원한 두명의 자살미수자, 퇴출 가수 정훈과 수녀 서원을 앞둔 수경은 서로를 위안 삼아 어딘가에서 나사가 빠져버린 각자의 인생을 돌아본다.
이것은 민규동 감독이 5년 만에 찍는 자신의 두번째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담고 있는 세계의 일부다. 그는 이 영화가 “한마디로 바보 같은 기획”이었다고 장난 삼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다. 여고 안에서, 세명 남짓한 주요 인물들과 합숙하다시피 촬영할 수 있었던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친구인 김태용 감독과 함께 찍을 때에도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가, 70군데 이상의 장소가 필요하고 주연급 인물만 열명이 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주목받았던 데뷔작과 너무 다른 영화를 찍고 있는 그 현장을 세번에 걸쳐 방문했다. 긴박하지 않은 촬영장이 그리 흔하진 않겠지만,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어느 정도 짐작가능한 그 조심스러움의 실체를 설명하는 것은, 이 영화가 담으려는 어떤 세상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듯 보이는 이웃들이, 알고 보면 가늘지만 단단하게 빛나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그런 세상 말이다. 10월7일 개봉을 앞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미리 엿본다.
절망의 플랫폼, 희망의 지하철 - 임창정+김수로
2005.06.21∼22 인천지하철 1호선 박촌역
지난 6월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순간. 인천지하철 1호선 박촌역에 들어서자,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보조출연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벤치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지를 깔고 잠을 청하며 지난한 기다림을 견디는 이들 사이로, 초췌한 모습의 민규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들고 생각에 잠긴 채 플랫폼의 끝과 끝을 오가고 있다. 헌팅해놓았던 전철역이 갑작스럽게 촬영 불가를 통보해왔고, 허겁지겁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 박촌역. 마지막 전철과 다음날 첫 전철 사이, 새벽 1시부터 4시까지가 제작진한테 주어진 시간이다. “공간이 장악되지 않으면 신 구성이 잘 안 된다. 시간상 순서대로 찍을 수도 없으니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지 등을 정하기 위한 시간을 가지려 했다”는 것이 감독의 사후적인 설명이다. 처음으로 찾아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현장은, 갑작스럽게 변경된 장소에 하루종일 움직이는 전철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촬영 탓인지, 묵직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애초의 촬영장소에서 촬영을 거부한 것은, 며칠 전 그곳에서 자살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날 박촌역에서 제작진이 찍으려는 장면에도, 선로에 떨어져 위기를 맞는 사람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없는 행복이라 여겼던 창후(임창정)는 절망의 끝에 다다른 느낌이다. 전철 안에서 강력 접착제 등을 팔면서 살아보려 애쓰는 그를 일상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하루가 멀다하고 걸려오는 카드사 직원, 성원(김수로)의 독촉 전화. 생계가 달린 물건 가방을 통째로 소매치기당한 뒤, 망연자실하여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는 창후에게 성원이 비척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다. 성원 역시 말 못할 삶의 무게로 압사직전이다.
영화 속에서 성원과 창후는 전화를 여러 번 주고받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이 순간뿐이다. 가난해도 선애(서영희)와 함께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꾸려나가는 창후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아빠라 부르는 진아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되는 성원은 각자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 전철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제각기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일곱 커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일주일간을 그리는 영화 <내 생애…>의 주인공은 무려 열네명. 이들은 영화 속에서 성원과 창후처럼 자신도 모르는 채 마주치고, 알 듯 모를 듯 영향을 끼치고 엇갈린다. <씨네21>은 이처럼, 다른 커플에 속하는 이들이 스치는 장면을 찍는 순간을 골라서 취재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네 생의 비밀스런 순간과도 같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그 광경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전철이 완전히 끊긴 새벽 12시 반. 적막한 플랫폼 곳곳에 다양한 옷차림의 보조출연자들이 자리를 잡는다. 시간은 없고, 프레임에 잡히는 인물은 많다. 정해진 수순처럼 조감독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진다. 따지고 보면 <내 생애…>는 전철역, 길거리, 병원 등 유난히 보조출연자가 많이 등장하는 영화. 민규동 감독은 촬영에 앞서 연출부한테, 화면에 잠깐이라도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 순간의 목적을 부여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지금 회사를 땡땡이치고 어디로 가는 건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면, 그 상대는 엄마인지 애인인지를 정해줘야 한다. 인물이 카메라 앞에서 기계처럼 움직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어느새 평범한 오후의 전철역이 카메라 앞에 펼쳐진다.
민규동 감독은 연출부와 함께, 스스로가 징그러워 낮술을 마신 성원이 병소주를 들 것인지, 페트병에 든 소주를 마실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첫 번째 컷. 술에 취한 성원이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창후에게 다가온다. “젠장, 나 사람 맞아? 어쩌다 세상이 이 지랄이 됐냐.” 혀꼬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저만치서 걸어오는 김수로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 그간 진지한 영화든 코믹한 영화든 웃음을 유발하는 감초 역할을 선보였던 그가, 영화 속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이른바 ‘정극’ 연기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에게 이전의 코미디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는 민규동 감독은, “리허설 때 상황분석까지 마친 리포트를 써왔던 배우”라며 김수로의 성실함을 설명한다.
벤치에 엇갈려 앉은 두 사람. 성원은 자신이 늘 빚독촉 전화를 걸었던 창후를 몰라보고 담배를 빌리려 한다. 카메라는 번갈아가며 두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을 짓누르는 힘겨움은 도무지 우위를 가릴 수 없이 버거워보인다.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 성원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보려 애쓰는 창후. 둘 중 그 누가 이 장면의 주인공일까. 조심스럽게 우문(愚問)이 떠올랐다. 해답은 “여기서 주인공은 성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을 회의하는 성원 말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을 못살게 굴던 사람을 위해 용기를 내는 창후로 중심이 옮아가는 것”이라는 감독의 설명에 있다.
아빠, 엄마의 애인 그리고 로봇 - 황정민+천호진
2005.06.20 분당의 한 완구점
그리고 9일 뒤, 6월20일 분당의 한 완구점에선 따지고 보면 연적 비슷한 관계에 있는 두 남자가, 서로의 정체를 전혀 모른 채 스친다. 여자 앞에선 꼼짝 못하는 숫총각 나 형사(황정민)는 당당하고 낙천적인 정신과 의사 유정(엄정화)과 데이트 비슷한 것을 시작한 참이다. 이혼녀인 유정의 아들 지석이 생일이란 말을 듣고 선물을 사기 위해 완구점에 들른 그는, 옆에 있던 손님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는 바로 조 사장(천호진), 그러니까 유정의 전남편이다. 관객은 그들이 서로 연관이 있음을 알지만, 나 형사와 조 사장은 이를 모른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고전적인 우연의 상황. 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이 의미심장한 스침 이후,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점. 적어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민규동 감독은, “이후 둘의 관계에 대해 뭔가 진행될 것 같지만, 그건 아니고. 뭔가 미묘한 분위기에서 유발되는 긴장감이 재밌을 것 같다”고 말한다.
고민하는 나 형사 옆에서 자신의 지갑을 보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달라는 감독의 요구에, 천호진이 이유를 묻는다. 엄마와 떨어져 아버지와 살고 있는 지석이 조 사장의 지갑에서 돈을 빼갔고, 이 순간 조 사장은 이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밝혀지는 것이 영화 속에서 더 이후의 일이라는 것. 따라서 이 장면에서 조 사장이 지갑을 보고 짓는 표정의 의미를 관객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한 민규동 감독의 생각은 꽤나 확고하다. “물론 지갑 속의 돈을 보여준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설명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배우가 화면 안에서 의미없이 서 있지 않았으면 해서, 지갑을 확인하는 동작을 넣었던 거다. 그렇게 되면 이후에 조 사장이 지석을 혼내는 장면과도 연결될 수 있다. 당장 관객은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이미지는 직관과 본능을 통해 잔상으로 남는다고 믿는다.”
제작진 중 누군가가, 이날의 촬영이 천호진에게는 마지막 촬영이면서 황정민에게는 첫 촬영임을 알려준다. 천호진이 연기하는 조 사장은 마무리된 캐릭터지만, 황정민의 나 형사는 이제부터 촬영과 함께 다듬어가야 할 캐릭터라는 뜻이다. 자신의 테이크가 끝난 뒤 모니터 근처에도 가지 않는 천호진과 달리, 한 테이크가 끝나자마자 모니터로 달려가고 감독의 OK 사인에도 한번 더를 고집하며 최대한 디테일을 만들기 위해 제안을 계속하는 황정민의 태도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마무리한 사람과 시작하는 사람의 차이일까. 그러나 민규동 감독은 두 배우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말한다. “둘 다 욕심이 많고 준비가 철저한 배우다. 하지만 현장에서 의견도 많고, 다시 한번 하겠다고 요구하는 황정민과 달리, 천호진씨는 일단 OK가 나면 더이상 돌아보지 않는다.”
5년 전.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찍을 무렵에는 세명의 주연은 물론이고, 수십명에 이르는 조·단역까지 모조리 신인급으로 채웠던 민규동 감독은 이제 “리허설도 필요없는 프로배우들과 함께” 두 번째 영화를 찍었다. “시나리오 외의 뭔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덜하지만”,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배우를 한꺼번에 경험하고 연출하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고. 마치 일곱편의 영화를 찍는 것처럼 힘들지만, “배우와 감독이 서로를 알아나가면서 의견을 조율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짧은 호흡이 못내 아쉽다.